이계홍 연재소설 ‘붉은 파도’…제9장 제거 (204회)

2022-12-29     남도일보

인생 종치는 기분으로 김형욱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고양이에게 쫓기는 생쥐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고양이에게 대드는 것과 같이 그도 발톱을 세우는 것이다. 곧 죽어도 가오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각하의 복잡한 사생활을 다 막아주었던 사람이야. 그의 밤 생활은 지저분했거든. 각하가 초임교사 시절, 시골 여자와 결혼을 하고, 딸아이까지 둔 것은 다 알기라. 교사직을 때려치고 해방 돼서 국방경비대 초임 장교로 근무할 때 이현란이란 아가씨를 데리고 가정을 꾸린 것은 잘 모를 기야. 거기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각하가 체포되어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던 시기에 죽었지. 그 과정에서 이현란이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6.25 전쟁이 터졌지. 이번에는 현재의 육영수 여사를 만나 결혼한 기야. 고향에 처자식이 있는데 또 결혼한 기라. 이런 뻔뻔한 인간이 어디 있노! 거기다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니 더 개판이었재. 영화배우, 탈렌트, 가수들을 돌아가며 데려다가 오입을 하는 기라. 그러면 말이 안새나가겠나. 여기저기서 소문이 퍼져가 색골 박정희란 말이 돌지. 영웅호걸은 여자를 밝힌다는 말로 소문을 잠재우고, 사나이들의 배꼽 밑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기 아니다라고 입을 틀어막지만 그기 막아지나. 더 먼지처럼 휘날리지. 하지만 그걸 내가 다 막았던 기라. 어떤 애는 억울하다고 자살하려는 걸 몰래 외국으로 빼돌려 잠재우고, 어떤 애는 각하하고 잔 것을 자랑하며 출세하는 기회로 삼으려 한 걸 혼내주고 막았지. 그 가족들까지 협박했지. 어디 가서 사위 얻었다고 지랄하느냐고 말이지. 스캔달 기사 좋아하는 기자들 입막고 광고 주고 촌지 뿌리고, 말 안들으면 죽인다고 겁을 주었재. 이렇게 틀어막느라고 내가 악역을 다 맡았다구. 출세의 기회로 삼으려는 애들 일수록 다른 고관대작에게 연결해주어서 본의아니게 구멍동서를 다 만들어주었고 말이야. 입막으려면 야비하지만 그 수가 닥상이야. 이렇게 철저하게 이미지 관리해준 사람을 몇몇 놈들의 농간과 모략에 넘어가 나를 패대기쳐? 그가 배신하면 나도 배신 때릴 수 있어! 나 화약고야. 건들면 터져버린다구!”

말을 마치고 그가 또 맥주잔에 양주를 가득 따라부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송안나가 그의 잔을 가로채며 말했다.

“부장님, 취하셨어요. 이러다 큰일나요. 함부로 말씀하시지 말아요. 자칫하면 변을 당해요. 난 부장님 말씀 안들은 걸로 할 거예요. 아니, 난 부장님을 안만났어요.”

“무시기 말씀이야? 아직 할 말 더 있어. 그자 여자 따먹은 얘기하면 끝이 없는 거 몰리나? 기래서 육영수 여사도 나를 얼마나 미워한 줄 아나? 아첨하기 위해 성상납한다고 나를 불러 혼내준 뒤 각하에게 대들었던 모양이라. 체신머리없이 놀면 부처 장관들이나 국회의원들이 뭘로 보겠냐고 항의했재. 그랬더니 각하가 담배 꽁초가 수북히 쌓인 잿터리를 육여사에게 던지며 ‘아낙네가 국사를 고민하는 어른한테 무신 앙탈이고?’ 하고 화를 냈지. 그걸 내가 욕바가지를 다 먹으면서 수습했던 기라. 그런데 지금 요 모양 요 꼴이 되고 만 기야!”

그러면서 느닷없이 술상에 엎어져 울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었다. 한참 후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그가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각하, 정말 나를 버리십니까. 이렇게 충성을 다했는데 단칼에 잘라버립니까.”

그러더니 이번에는 정색을 했다.

“송마담, 이러다 내 명에 못살 것 같소. 후견인이 필요해요. 타일러 장군과 만날 수 있게 연결해주시오. 그가 원한다면 내가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도 됩니다.”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거절로 알았던지 그가 다시 간절하게 호소했다.

“국내에는 나를 보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소. 미국이 내 뒤에 있어야 내가 버틸 수 있소.”

“글쎄요.”

송안나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며칠 전 타일러 장군의 옛 부하들이 다녀갔다. 베트남에서 탄피를 수입하겠다는 의사를 타일러 장군에게 연결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들은 국내의 놋그릇 제조공장에 놋쇠 원료를 제공하는 업자들의 로비를 받고 있었다. 이미 탄피 수입처가 있는데, 그곳을 제외하거나, 안되면 일부 물량이리도 받기 위해 그를 움직여보도록 송안나를 찾은 것이다. 송안나는 타일러 장군의 성격을 아는지라 알겠다고만 대답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타일러 장군은 명분이 분명치 않으면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방위산업 수입선 문제는 중정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