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연재소설 ‘붉은 파도’…제9장 제거 (205회)

2023-01-02     정희윤 기자

 

“내 솔직히 말하리다. 청와대 들어갔다 나왔는데 나 이렇게 되었소.”

그가 손으로 자기 목을 싹둑 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세상에. 그럴 수 있어요? 해임되었다구요? 각하의 복심 중의 복심이 김 부장 아니신가요? 그런데도 하루 아침에 목이 날라가요?”

“그러니 내가 미치고 환장하지 않겠소? 이거 완전히 죽쒀서 개준 꼴이오. 어떤 놈이건 씹어먹어도 분이 안풀리겠소.”

그가 술에 복수하듯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정봉필이 룸으로 들어와 송안나 마담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밖에 웬 낯선 사람 둘이 찾아왔습니다. 잠깐 뵙자고 합니다.”

나가보니 두 청년이 긴장한 모습으로 대청마루 앞 한켠에 서 있었다.

“무슨 일로 왔죠?”

그녀가 묻자 대답 대신 한 청년이 되물었다.

“김형욱이 여기 와있죠?”

직함도 생략하고 존칭도 붙이지 않은 채 묻는 것이 이상했다. 순간 암살조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으나 냉정하게 나무랐다.

“왜 어른한테 그렇게 함부로 말하세요? 버릇이 없군요. 어떻게 알고 여기 왔나요?”

“그자 이제 끈떨어진 뒤웅박 신셉니다. 우리는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늘을 기다렸다뇨?”

대답은 않고 두 놈이 마루로 올라서서 룸으로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순간 송안나는 그들이 누군가 보낸 협객이란 것을 알았다. 정적이거나 피해를 본 자들, 그게 아니면 권력의 하수인들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의 적은 이렇게 도처에 깔려있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오후 5시부터 해임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그녀는 이자들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 청년이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송안나 마담도 김형욱의 하수인인 중정 놈들한테 당했죠? 우리 다 알고 왔습니다. 송마담과 사귀었던 사람, 고문사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당신도 우리의 우군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런 놈은 뽄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한 심판을 해야 합니다.”

송안나가 화를 냈다.

“당장 나가지 못해요?”

청년이 물러나지 않고 그녀 앞으로 바짝 다가들었다. 자기들 행동이 정당하다는 뜻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새끼 살려두는 자체가 역사의 치욕입니다.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억울하게 감옥으로 끌려갔습니까. 저런 놈은 단연코 단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역사의 정의가 바로 섭니다.”

송안나가 청년의 뺨을 후려쳤다.

“당장 나가지 못해요? 당신들 말마따나 끈떨어진 신발 신세 되니까 치는 건 비겁해요. 비열해요. 치려면 힘쓰며 횡포를 부릴 때 나섰어야죠.”

그들이 주춤하고 서있자 송안나가 그들을 옆방으로 끌어들여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저 사람이 독재의 앞잡이가 되어서 민주투사들을 잡아가두었다고 해도 지금은 권력으로부터 배척당했어요. 군부정권의 한 축이 되어서 모든 악역을 맡아 한 악질인 건 부인할 수 없죠. 하지만 저 사람도 하수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권력의 입장에선 저런 사람을 이용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열불만 나 있을 뿐, 아무 권한이 없어요. 그러면 저런 사람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요? 탄압과 고문당했다는 이유로 복수하겠다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행동이에요.”

청년들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