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연재소설 ‘붉은 파도’…제9장 제거 (208회)

2023-01-05     정희윤 기자

 

그때 김형욱의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송마담 어디 갔나? 왜 안들어오나? 나 괄세하니?”

그 말을 듣고 송안나가 청년들을 향해 서둘러 나가달라는 손짓을 했다.

“당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면 더 복잡해져요. 나는 당신들을 몰라요. 아끼니까 비밀로 하는 거예요. 조용히 물러나세요.”

그들이 주춤하자 송안나가 거듭 말했다.

“저 사람 지금 외로운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해친다면 떳떳하지 못하죠. 나가세요.”

그래도 청년들이 머뭇거리자 송안나가 밖에다 대고 정봉필을 불렀다.

“정 부장, 이 사람들 밖으로 내보내!”

정봉필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눈을 부라렸다.

“당신들 뭐여? 남의 영업 망칠려고 하는 것이여? 나가줘야겄어.”

“저 악질을 가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자 정봉필이 눈꼬리를 말아올렸다.

“한번 안된다면 안되는 것이제. 당신들 정말 남의 업장 말아먹을 작정이여? 좋은 말할 때 나가는 것이여. 당신들 여기서 행패부리면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부러!”

그는 일부러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이 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밖으로 사라졌다. 나가는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정봉필이 눈을 찡긋해보였다. 뭔가 야료가 있는 태도였다. 하긴 그들이 뜬금없이 화원을 찾았을 리는 없을 것이었다.

송안나가 김형욱의 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반쯤 쓰러져 있었다. 그를 부축해 일으키자 그의 눈에 눈물이 어려있었다.

“내 고향 진남포는 아름다운 곳이지. 나는 고향에서 돌아돌아 먼 길을 왔지. 오갈데 없어서 군대에 들어가고, 국방경비대사관학교 5기생으로 들어가고, 소위 임관하고, 6·25를 만나고, 그러면서 세상 힘들게 헤쳐왔지. 모두 허무한 기라…”

그가 방바닥에 음식물을 토하기 시작했다. 한 양푼 가까이 쏟아내는 음식물과 술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송안나가 놀라지 않고 정봉필을 급히 불러 일렀다.

“정부장, 이 분 부축해서 근방 호텔에 모셔다 드려.”

그는 해임되었으므로 지금은 한갓 개인 자격일 뿐이다. 관용차는 벌써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본부의 지침을 받은 듯 운전사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아마도 현직이었다면 이런 일은 꿈에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적이건 개인적이건 경호팀과 운전사가 24시간 따라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주위에 파리 한 마리 따라붙지 않는다. 권력의 비정함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정봉필이 김형욱을 부축해 골목을 나오는데 갑자기 김형욱이 정봉필의 다리를 걷어찼다.

“임마, 나 안죽었어. 너희놈들이 그래봐야 니들이 먼저 골로 가게 되어있어. 내가 만만히 물러날 사람이야? 그럴려고 혁명한 줄 아나? 목숨 걸고 한 거야! 혁명을 혼자한 줄 알아? 어림없어. 그 자는 실패한 줄 알고 새벽까지 무교동 용금옥에서 술쳐먹고 튈 생각만 하고 있었어. 그걸 내가 일깨우고 부추겨서 육본 접수하고, 중앙청 접수하고, 방송국 접수했단 말이야. 나를 뭘로 알고 지랄 떠는 것이야?”

그러면서 누구에겐가 복수하듯 정봉필을 계속 걷어차는 것이었다.

“나한티 시방 술주정하는 거요? 왜 발길질이요?”

정봉필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정봉필이 성질이 뻗쳐서 대드는데 “니 뭐라고 씨부렁거리노?” 하며 그의 주먹이 날라왔다. 그 주먹은 정통으로 정봉필의 턱에 꽂혔다.

“정 이러면 나도 감당 못하지라우. 들어봉깨 낙동강 오리알 신세 같은디, 나가 그런 걸 들어주는 한가한 놈이 아니요. 당신 혼자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쇼. 나는 하는 디까지 다 했승깨!”

그리고는 화원으로 돌아와버렸다. 김형욱이 비틀거리며 골목의 브로크 담벼락 앞에서 오줌을 누며 뭔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달려들더니 각목으로 그의 뒷덜미를 내려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