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연재소설 ‘붉은 파도’…제9장 제거 (215회)
“무슨 역할?”
“민주화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반독재 투쟁을 하는 놈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부장님이 사는 길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코호트 사장께서 말씀드린 취지도 그런 것입니다. 그동안 저지른 과오를 회개하면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뜻을 밝히면 미국 방문 비자를 내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건 극비의 조치입니다. 그렇게 약속하신다면 코호트 사장이 돕겠다고 하십니다.”
그가 코호트를 바라보았다. 코호트는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궁이 그동안 생각하던 것을 말했다.
“남북 화해의 문제는 야당이나 진보세력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 노상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들고 나오는 무리들 아닌가.”
“냉전 세력들이 가만 놔두겠습니까. 당장 이적죄에 반공법, 보안법으로 다스리겠죠. 부장님이 그렇게 해왔잖습니까. 그렇게 해서 간첩사건을 조작해 발표하고, 재야인사를 탄압하고, 학생 시위를 북한의 사주를 받은 체제전복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미행, 감시, 체포하지 않았습니까.”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고? 이놈, 어디서 그따위 말을 내뱉나?”
건방진 태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장님, 마저 학생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지금은 화를 내실 때가 아닙니다.”
김비서가 나서서 김부장을 말렸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그가 호통을 쳤다.
“당장 잡아가두겠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이제는 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는 누구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제 말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십시오. 저는 마지막으로 부장님의 목숨을 구하려는 충정에서 말씀드립니다. 지금 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부장님이 이제 와서 정권에 충성을 보인다는 것은 비겁자로 매도될 뿐입니다. 아마도 경멸하고 조롱하며 더욱 비참하게 밟아버릴 것입니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죠. 그래서 기왕에 드리는 말씀인데, 부장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시면 통일운동에 앞장서십시오. 부장님의 고향이 이북 아닙니까. 이북 출신들이 대개는 대북 강경파인데 그건 부도덕한 정권을 도와주며 빵부스러기를 얻어먹는 비열한 짓일 뿐입니다. 일천만 실향민의 속마음을 배신하는 짓이죠. 북의 집단을 쳐부술 대상으로 생각하면 전쟁밖에 더 나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군사력이 막강해진 토대 위에서 화해로 평화를 사야 한다는 운동입니다. 아무리 비싼 평화라도 값싼 전쟁보다는 염가입니다.”
‘이 새끼,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냐’는 듯이 김형욱이 남궁현일을 노려보았다.
“하나 더 아는 체를 하겠습니다. 다니엘 벨이라는 미국의 사회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1950년대 말 이미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했습니다. 벌써 20년 전의 주장이죠. 서구의 타락과 무질서, 약육강식의 세상보다 복지국가의 허용, 권력의 분권화, 혼합경제 체제와 다원적 정치체제에의 합의를 지향하자는 이론입니다. 소련 등 동유럽 제국에서의 화석화된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다고도 보는 견해죠. 자본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 모두 교조적·광신적 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것을 맹렬히 비판하죠. 시대의 흐름은 이런 방향으로 변해가는데 우리는 분단이라는 대결적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서 주구장창 동포를 쳐부수자고 외치고, 부도덕한 독재정권을 강화합니다. 그렇다고 정상적인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킨 것도 아닙니다. 공포와 억압이라는 폭력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쏘아죽이고, 찔러죽이고, 찢어죽이자는 잔혹한 증오의 언어만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념논쟁이 불안과 긴장,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세상은 급격히 달라질 것입니다. 탈이데올로기가 대세입니다. 그 시대를 선도하는 대오에 서세요. 김부장께서 남북화해 정책에 앞장선다고 변신을 선언하면 세계의 양심은 물론, 동포사회가 다르게 볼 것입니다.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어느 누구에게 당할지 모르게 처참하게 당하게 될 것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벌써 취했는지 그는 의자에 퍼져 쿨쿨 자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년 후 그는 박사학위를 받는다며 비밀리에 대만으로 출국하더니 미국으로 훌쩍 건너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