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신건호의 서치라이트] "응답하라" 설렘의 마중물이 되는 자는 없는가!

신건호(남도일보 전남 동부권 총괄취재본부장)

2023-02-07     신건호 기자
신건호 남도일보 전남 동부권 총괄취재본부장

봄을 기다리는 그대여! 왈츠가 생각나는 3월의 길목 2월을 맞아 봄꽃을 기다리는 설렘, 초록빛 청보리가 출렁이는 들녘, 그 봄의 아지랑이 사이로 피어나는 파란 새싹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는가! 새해 첫날의 기대와 설렘은 여전한가!

잠들었다 눈을 뜨면 “다음 날(日)일지, 다음 생(生)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티베트의 속담처럼 우리의 삶은 늘 새로움을 시작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다행히 다음 생이 아닌 2월의 오늘을 맞았으니 얼마나 행복하고 설레는 일인가!

설렘, 그것은 하루를 시작하는 삶의 마중물이다. 한 바가지 마중물은 늘 우리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살아오면서 무너져 내린 순간이 많았음에도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진 세월을 감내하신 부모님과 형제자매, 주위 분들의 보살핌 속에 크고 작은 설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과 첫 출근, 결혼, 아이 탄생 같은 설렘은 삶의 마중물처럼 다가왔다. 아내를 지금껏 사랑할 수 있는 비결 역시, 첫 만남의 설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장의 떨림을 숨기는 순수함의 결정체가 첫 만남의 설렘이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마주친 눈을 바라보면 온 세상이 그 사람으로 가득했던 그 순간 얼마나 황홀했던가!

그래서 삶은 설렘의 연속이어야 한다. 신영복 교수는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은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고 했다. 삶이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새날, 그 시작에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말일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날마다 낯선 새날이지만 삶의 변화가 필요할 때,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 그것이 새로운 설렘을 위한 용기가 아닐까 싶다. 내일도 새날일 것이다. 단지 낯선 새로운 날에 대한 ‘설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새해를 맞거나 새날이 오면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덕담을 주고받는 삶을 살았다. 설렘은 그런 마음에서 출발하고 그 실천이 바로 사랑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오늘, 모든 삶의 일상에서 첫 마음에 설렘이 늘 함께하면 좋겠다. 그 설렘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요즘 새날인데도 설렘을 찾기가 힘들다. 민망하지만 현실이다. 새해 첫날부터 난방비는 오르고 가게 손님은 뜸하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걱정이 걱정을 더 하는 현실인데도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캄캄한 건 앞날이다.

새 인물에 대한 기대, 새 정책에 대한 비전, 새로움에 대한 새날의 설렘이 우울한 현실을 거둬낼 것이라는 희망과는 달리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는 설렘마저 오뉴월 햇빛에 방치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있으니 나만 그럴까! 지하철에서도 일터에서도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사람들의 밝은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은 걸 보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이 말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는데, 설렘의 환상을 깨는 중심에 여전히 그들이 있다. 정치인이다. 멋지게 보이던 그 입은 막말을 쏟기 위한 옥타브만 키우고, 점잖게 보이던 그 손짓은 남의 탓을 향한 비열한 힘을 자랑하는가 하면, 거짓이 분명한데도 천연스럽게 나대는 태도를 보면 실종된 것은 예의와 인간미뿐만이 아니다. 서민들의 가슴 속 설렘까지 강제로 소환시키고 있다.

이슬만 먹고 살 것같던 그녀가 거리의 투사로 나서야 하는 환경을 만드는 그들이 바로, 설렘을 빼앗는 주범이다. 소환의 대상이다. 그들의 지도력은 희망보다 절망에 가깝다. 쪼잔함의 극치다. 남아있는 설렘의 순정은 빛바랜 열정, 모래밭에 던져진 바늘이다. 도덕적 기대치를 낮추고 현실에 맞추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은 아닐 턴데도 그렇게 사는 이들이 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참담하다.

칠레의 늪에는 ‘리노데르마르’라는 개구리가 산다. 이 개구리는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그 알을 입속의 소리주머니에 넣고 삶을 지탱하는데 알을 넣은 후에는 입을 벌리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다가 알이 입속에서 부화하면 그때서야 올챙이를 토해내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이러한 희생으로 ‘리노데르마르’ 개구리는 그들만의 세상을 만든다. 이 수컷 개구리처럼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다음 세대를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 정치요, 사랑이다.

사랑은 설렘 유지의 필수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속에 숨겨져 있는 욕망, 많은 것을 가지고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 그런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세, 국민이 바라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리노데르마르’ 수컷 개구리와 같은 자기희생이지 욕망을 숨긴 가면웃음이 아니다.

자기희생으로 설렘의 마중물이 되는 지도자, ‘죽어야 부활한다’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가 많은 나라, 그런 세상을 기대하는 국민에게 사랑받고 설렘을 선물하는 지도자는 없는가? 있다면 “응답하라” 개미 소리라도 좋다. “저요!”라고 손드는 사람, 국민은 바로 그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