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으로 되짚어보는 5·18항쟁 (2)윤상원과 김상윤의 만남
외교관 꿈꾸던 평범한 대학생 세상에 눈을 뜨다 육군 하사관 전역 전남대 복학 타임지 읽으며 외무고시 준비 당시 유신체제 반대 투쟁 격화 민청학련·2차 인혁당 사건 발생 광주일고 재학생들까지 구속돼 윤, 친구들과 민청학련 연루자 김상윤 만나 시국학습 지도받아
다음달이면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는다. 올해 광주의 5월은 어느 때보다 화해와 평화 분위기가 뜨겁게 형성될 전망이다. 최근 광주시민들의 민주주의 외침을 총칼로 짓밟았던 고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씨가 잇따라 광주를 방문해 무릎꿇고 사죄했고, 5·18 유가족들은 힘껏 껴안으며 포용했다. 앞선 2월에는 (사)대한민국 특전사 동지회와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공로자회가 함께 화해의 손을 잡았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가해자측의 잇따른 행보다. 이에따른 진실규명 목소리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남도일보는 5·18민주화운동의 참 의미를 다시금 살펴보고자 본면에 ‘윤상원으로 되짚어보는 5·18항쟁’을 연재한다.
◇ 대학시절 일기장 남아
1950. 8. 19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1987년 이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570-1로 변경)에서 아버지 윤석동 씨와 어머니 김인숙 여사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 올린 이름은 개원(開源)이다. 임곡면 소재지의 가톨릭 계통에서 운영했던 임곡유치원에 다녔고 임곡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4학년(1960년 1월) 때부터 두 할머니 중 작은할머니의 지도로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고교 졸업 때까지 꾸준히 쓰고 대학 시절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쓴 일기장이 지금도 남아있다. 광주북중학교(15회), 광주사레지오고등학교(8회)를 다녔다. 196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송정리 성당에서 광주사레지오고 교목인 원 신부로부터 ‘요한’이라는 세례를 받았다.
1971년 전남대학교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친구 김석균과 함께 전남대 연극반(현재 극문화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1972년 6월 12 육군에 입대해 하사관으로 경북 상주에서 복무했다.
◇외교관 꿈 위해 영어공부 매진
1975년 3월, 군에서 제대한 윤상원은 2학기에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복학한다. 윤상원은 전대 정문 부근 중흥동에 단칸방을 얻어 동생들과 함께 자취를 했다. 당시 그의 목표는 외무고시 패스였다. 거의 매일 전대도서관에서 공부하며 지냈고,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주로 테니스를 쳤다. 교정에서 윤상원은 한 손에는 영자신문 ‘타임’ 지를, 다른 한 손에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며 외교관으로서 꼭 필요한 영어공부와 운동을 병행했다.
그러나 윤상원은 제대함과 동시에 역사의 격랑에 부닥친다. 윤상원이 군복무 중 유신헌법이 선포되었고,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화되자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담화의 요지는‘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유신선포와 민청학련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수사상황을 발표하며 민청학련을‘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 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천 24명이 영장 없이 체포되고, 그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되었다.
또한 5월 27일, 비상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고, 이들이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했다고 발표한다. 이것이 곧 세칭 인혁당 재건위원회(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7월 11일, 비상 보통군법회의 재판부는 군검찰부의 구형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7월 13일에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32명 중 이철, 유인태 등 7명에게는 사형, 나머지 관련자에겐 무기징역(7명), 징역 20년(12명), 징역 15년(6명) 등이 선고됐다. 그러나 이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에 의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형 확정18시간 만의 사형집행
비극적인 사건은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등 39명에 대한 대법원 전원재판부(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은 물론 변호인조차 없는 상태에서 상고를 기각하였다. 분노한 가족들의 절규와 항의가 이어졌지만 18시간 후인 4월 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틀 뒤인 1975년 4월11일, 서울대생 김상진(1949년생)이 유신 철폐를 주장하며 할복자결하였다. 광주일고에선 김상진 열사를 위한 학생 추모시위를 주동하던 3학년 박석면이 제적(4월15일)되었다.
이어 4월30일 시위 계획이 발각돼 광주일고 2~3학년 40여명이 경찰에 불법 연행돼 구타·고문을 당했다. 최수일·오순기·황광우 등 주동자 3명은 구속됐다. 당시 열일곱, 열여덟 살의 학생 17명(박석면 포함)이 긴급조치로 집단 제적된 것은 ‘한 사람이 누려야 할 고교 시절의 삶을 강탈해 간 일종의 시한부 사형’이었다.
최수일 등 3명의 고등학생들은 광주교도소 0.9평 규모의 징벌방에 수감됐다. 위와 같은 사건을 계기로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는 5월 13일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긴급조치 9호
긴급조치 9호는 다음과 같다.
① 다음 각 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 당국의 지도, 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예외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② 제1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
③ 재산을 도피시킬 목적으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국외에 이동하거나 국내에 반입될 재산을 국외에 은닉 또는 처분하는 행위를 금한다.
④ 관계 서류의 허위 기재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해외 이주의 허가를 받거나 국외에 도피하는 행위를 금한다.
⑤ 주무부장관은 이 조치 위반자·범행 당시의 그 소속 학교·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나 장에 대하여 다음 각 호의 명령이나 조치를 할 수 있다.
가. 대표자나 장에 대한, 소속 임직원·교직원 또는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의 명령
나. 대표자나 장·소속 임직원·교직원이나 학생의 해임 또는 제적의 조치
다. 방송·보도·제작·판매 또는 배포의 금지 조치
라.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의 조치
마. 승인·등록·인가·허가 또는 면허의 취소 조치
◇김상윤과 의식화 학습
겨울방학이 되어 윤상원은 어느 날 친구 김석균과 황철홍의 권유로 김상윤을 만나게 된다. 선배 김상윤(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1975년 2월 16일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열 달쯤 되는 때였다. 외무고시를 준비했던 윤상원은 민청학련에 대해 신문·방송에 나오는 피상적인 내용 정도 알고 있었고, 당시 광주일고 학생들의 무더기 제적사태도 뉴스로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
윤상원은 바로 이 시점에 복학했다. 군 입대 전 교련반대 시위로 강제징집되었던 정상용(5·18항쟁지도부인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위원장), 이양현(민주시민투쟁위원회 기획위원)과 입학동기인 윤강옥(민주시민투쟁위원회 기획위원)도 다시 만났다.
민청학련으로 제적되었던 학생들은 수시로 학교 안과 밖에서 친구 선후배들을 만나 시국을 논하고 있었다. 그 중 재학생 가운데 절친인 김석균과 황철홍이 있었다. 윤상원은 이들을 통해 김상윤을 만나 충격적인 진실들을 마주하게 되고, 부당한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열혈청년 윤상원은 곧바로 양승현, 신정식, 이현우 등과 함께 학습팀을 꾸려 김상윤의 지도를 받게 된다. 김상윤은 윤상원을 지도하면서 그가 평범한 청년에서 운동가로 거듭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김상집 (사)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