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으로 되짚어보는 5·18항쟁 (8)광천동 들불야학

지역개발·빈민운동 활동가들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주목 6·25 후 피난민·부랑자 다수 거주 광주시 건립 아파트 170세대 입주 생활환경 열악에 전남협동개발단 광천삼화신협 등 사회사업 추진 재정 문제 따른 좌초 위기 상황서 김영철, 들불야학 등 사회사업 시작 귀향 후 공장생활하던 윤상원 접촉 들불야학 학생·강학과 본격 활동

2023-06-27     김명식 기자

■윤상원으로 되짚어보는 5·18항쟁


(1)프롤로그-최후의 항전
(2)윤상원과 김상윤의 만남
(3)김남주와 카프카 서점
(4)70년대 활동가들과의 교류
(5)윤상원의 본격적인 활동
(6)녹두서점
(7)짧은 은행원 생활과 노동운동

▶(8)광천동 들불야학

광천동 시민아파트 모습. 625전쟁 후 피난민과 부랑자들이 다수 거주하던 광천동에 광주시가 건립한 3개동 170세대 아파트로, 1970년 광주의 사회활동가들의 주요 사업 대상이었다./윤상원 기념사업회 제공
시민아파트 내부의 좁은 통로. 거주민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보여준다.

◇민주시민투쟁위 기획실장 김영철

들불야학이 광천천주교회 교리실에 문을 열 즈음, 김영철은 광천동 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 빈민운동을 하고 있었다. 김영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초대 교회로 불리우는 바닥교회 곧 기초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꿈을 지닌 젊은이였다.

9급공무원에 합격하여 승주군 별량면사무소에서 잠시 공무원 생활도 했던 김영철은 군에서 제대한 후 광주와 서울 등지에서 주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마음만은 늘 하느님의 나라 곧 공동체에 대한 꿈을 안고 있었다. 기독교의 기초공동체를 갈망하는 김영철에게 신용협동조합은 누구보다 친근하게 다가왔다.

신용협동조합은 1972년 신협법이 제정되면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전국 각지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전남신용협동조합운동은 <전남협동개발단>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고 있었다. <전남협동개발단>은 단장에 조아라 광주YWCA 회장, 부단장에 광주 <영신원> 서경자 원장, 그 외에 조명제, 정구선, 장두석 등 지역개발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참여한 단체였다.

김영철을 전남협동개발단과 인연을 맺어준 사람은 부단장인 서경자 영신원 원장이었다. 서경자 원장의 권유로 김영철은 1976년 1월 7일부터 24일까지 2주일에 걸친 제51차 신용협동조합지도자교육에 참여하였다. 이 교육에는 장두석의 권유로 전남대 농대생인 조봉훈과 김명수 등 기독학생회와 민청회원 다수가 참여했다.

1977년 3월, 순천신협 지도자 강습회 추진과정 등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인정받아 김영철은 전남협동개발단 간사로 임명되었다. 전남협동개발단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영철은 아내와 갓난 아들 동명이를 데리고 순천에서 광주 학동의 영아원으로 이사를 하였다. 당시 전남협동개발단은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민지역발전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천동은 원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고수부지였는데 광주천의 제방을 막아 피난민과 부랑민 수용소를 세운 자리로 인구가 늘자 광천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광천동 시민아파트는6·25 직후의 피난민과 부랑민 수용소에 광주시에서 아파트 1, 2, 3동을 건립하여 170여 세대가 입주하였다.

1971년 박재봉 총무는 광주YMCA에 부임하여 한국전쟁으로 인한 북한 피난민과 부랑아수용소가 있는 광천동에 주목하였다. 박재봉 총무는 광주YMCA신협을 광천동으로 확장하여 빈민운동을 목적으로 1972년 2월 9일 광천삼화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명칭도 광천삼화(光川三和)라 하였는데 삼화(三和)란 시민아파트 1, 2, 3동의 주민이 화합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박재봉 총무는 광주YMCA 내에 염기열을 프로그램 간사로 배치하여 광천동 지역개발사업을 누차 시도하였으나 북한 피난민과 부랑아수용소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알코올중독자가 너무 많았다.

조합원 모집은 지지부진한데다 광천삼화신협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했고, 광천삼화신협 실무자가 출자금까지 써버려 주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3ㆍ1민주구국선언과 기장전남노회 활동을 빌미로 박재봉 총무가 1976년 광주YMCA 총무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떠나게 되자, 광천삼화신협에 대한 외부 지도사업마저 중단되어 해산위기까지 내몰리는 상황이었다. 박재봉 총무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천삼화신용협동조합은 주민들의 장래희망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는 결과가 되었고 도리어 주민들은 외부사회를 경원하게 되었다.

김영철은 그가 처음 그곳을 찾아갔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방 군데군데가 쓰레기장이었고, 아파트 복도는 암굴처럼 어두웠고, 내부 벽은 매우 더러웠으며, 공동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어서 냄새와 메탄가스로 눈이 따가웠다. 놀이터가 없어 어린이들은 부서진 리어카 위에서 난폭하게 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는 1977년 10월, 주민들과 직접 생활하기 위해 학동의 영신영아원에서 시민아파트 A동 216호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먼저 아파트의 주민들을 종교별, 학교별, 직업별로 나누고 175가구의 각 호마다 수입, 지출, 부채 등의 기초조사표를 만들어 종합개발사업 계획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청년회를 부활시켜 총무를 맡고, 청년부 산하에 청소년부를 두어 어린이 주말학교 운영과 아파트 대청소를 실시하였다. 어린이들의 이름을 외워 아침마다 청소하자고 불렀으며 청소가 끝나면 인근 효광여중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였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어린이 주말학교를 아파트 옥상이나 인근수영장 등에서 개최하여 능력개발 훈련과 각종 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또한 1978년 1월 6일 적자로 폐업 상태에 있던 광천 삼화신용협동조합을 인수받았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빈 병을 모아오게 해 출자금 통장을 발행하여 성인조합원까지 확대하여 신협을 정상화시켰다. 마침내 1979년 11월 4일 광천동 중심상가의 복판지점인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여 급속한 성장을 보였고 1980년 5월민중항쟁 당시까지 이사장을 맡았다. 상무는 3년 선배인 김길만이었다. 그는 주민들에게 지역 활동을 인정받아 처음에는 A동 반장을 맡았지만 나중에는 광천동 11통 합동반상회에서 새마을 지도자로 선출됐다.

1978년 7월 전남협동개발단이 해체되어 김영철이 추진하고 있던 광천동시민아파트 지역개발운동도 공식적으로는 중단되었다. 광주YWCA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이면서 전남협동개발단 부단장인 서경자 영신원 원장의 배려로 그는 광주YWCA신용협동조합 참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남협동개발단이 해체되었지만 그는 광천동시민아파트 지역개발운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운동은 그가 평생 동안 추진하려고 했던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광천동 들불야학 1기 강학(교사)인 김영철(오른쪽 서 있는 사람)이 들불야학 학생 및 강학들과 함께 야외 수업을 하는 모습. 김영철은 파산 상태였던 광천삼화신용협동조합을 인수하는 등 시민아파트를 비롯 광처동 지역개발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그는 서울 직장 생활중 노동운동을 위해 귀향한 윤상원에게 들불야학 참여을 권유한다./윤상원 기념사회 제공
광천동 지역개발사업은 1970년대 전남협동개발단 등 지역의 사회활동가들에 의해 추진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남협동개발단의 사회개발지도자 강습회 모습./윤상원 기념사업회 제공

◇들불 야학

들불야학은 서울에서 야학 교사 경험을 가지고 있던 전복길(서울대 75), 최기혁(외대 76), 김영철(동명이인, 서울대 76) 등 광주 출신 대학생들이 처음 제안하여 1978년 5월부터 창립을 준비하였다.

그해 7월 들불야학은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서 35명의 노동 청소년들과 8명의 강학으로 출발하였다. 강학들은 주로 서울에서 학생운동 하다 휴학하고 내려온 학생들과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이었다.

김영철이 기획한 광천동종합개발계획서에도 돈이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청소년을 위한 야간중학교 건립이 있었는데, 여력이 없어 야간중학교 설립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야간학생을 모집한다는 벽보를 보고 김상윤을 찾았다.

이에 김상윤은 전남협동개발단의 간사로 광천동시민아파트 지역개발운동을 해왔던 김영철을 들불야학에 소개하였다. 김영철은 전복길, 최기혁, 김영철, 박기순, 신영일, 임낙평, 나상진, 이경옥 등 들불야학의 강학들을 만나고, 광천천주교회 교리실에서 입학식에 참여하여 지역주민을 대표해 축사를 하였다. 그리고 강학들과 친해지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그는 특별강학으로 참여하여 시사 과목과 레크리에이션을 맡아 수업을 하였다.

김영철

 

 

염기열

 

◇김영철과 윤상원의 만남

10월 중순부터 생활을 송두리째 공장 노동과 들불야학 예비교사 활동에 쏟아부어야 했던 윤상원은 우선 안정된 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마침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입주해 주민운동을 하고 있는 김영철은 윤상원에게 거처를 그쪽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윤상원은 김영철의 지역사회개발운동(빈민운동)에 대해 김상윤과 들불강학들에게서 들은 터여서 김영철의 권유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외롭게 빈민운동을 해왔던 김영철은 자기 동네에 들불야학이 창설되는 것을 보면서 우군을 만난 것처럼 기뻐했고, 더구나 듬직한 윤상원이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빈민운동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다면 더욱 큰 성과가 있을 것 같아 일부러 윤상원을 이끌었던 것이다.

1978년 11월, 윤상원은 광천동 시민아파트의 방 한 칸을 사글세로 빌어 들불야학 학생 백재인과 함께 살게 되었다. 거처를 옮김과 동시에 윤상원의 방은 들불 강학들과 학생들의 새로운 모임터가 되었다.

◇양동신협에 취직하다

윤상원은 들불야학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도 항상 김상윤·이양현과 긴밀히 논의하고 있었다. 이들은 윤상원을 통해 들불야학에 꾸준히 재정을 대는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양현은 체력적 한계와 빈궁한 처지는 운동가로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사안이라고 격려해주었고, 윤상원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루에도 수차례 되뇌고 있었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윤상원은 한남플라스틱 공장 노동을 포기하고 말았다. 매사 낙천적이고 환한 미소로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했던 윤상원의 표정은 의기소침해졌다. 그리하여 야학을 뒷바라지하면서 더불어 생계도 해결할 수 있는 일터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김상윤과 이양현은 신협 전남도지부 부지부장인 장두석을 통해, 광주 최대의 신협인 양동신협 이사장 김세원에게 부탁하여, 윤상원은 양동신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김상집 (사)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