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으로 되짚어보는 5·18항쟁 (17) 민주시민투쟁위원회와 결사항전
시시각각 다가오는 계엄군…청년·학생들 ‘결사항쟁’ 의지 계엄군 탱크 진입에 수습위원들 도청~농촌진흥원 ‘죽음의 행진’ 항쟁지도부서는 기동타격대 운영 광주 진입 주요도로에 배치 경계 학생수습위, 끝까지 투쟁 의지에 예비군 300여명 무기 지급 요구 ‘총기 회수’ 투항파 도청 떠난뒤 민주투쟁위 구성 최후 항전 결의
(1)프롤로그-최후의 항전
(2)윤상원과 김상윤의 만남
(3)김남주와 카프카 서점
(4)70년대 활동가들과의 교류
(5)윤상원의 본격적인 활동
(6)녹두서점
(7)짧은 은행원 생활과 노동운동
(8)광천동 들불야학
(9)윤상원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
(10)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11)작전명 ‘화려한 휴가’
(12)국민연합의 전국동시다발 시위 계획
(13) 집단발포와 전라민중무장봉기
(14)해방 광주
(15) 총기회수와 재무장
(16) 민주세력의 결집과 재무장
▶(17) 민주시민투쟁위원회와 결사항전
◇죽음의 행진
5월 26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급보가 시민군의 무전기를 통해 상황실에 보고되자 도청에 비상이 걸렸다. 곧바로 도청 전 병력이 무장출동할 수 있도록 무기와 탄약 보급이 이루어졌다. 바로 하루 전날 남동성당에서 회의를 마친 후 곧장 도청으로 들어와 수습위 사무실인 2층 부지사실에서 함께 철야를 하던 이성학 제헌의원, 홍남순·이기홍 변호사, 김성용·조비오 신부, 김천배·이영생 광주YMCA 이사, 윤영규·장사남 교사 등 17명의 수습위원들이 머리를 맞댔다. 김성용 신부가 말했다.
“수습위원 여러분, 차라리 우리들이 총알받이가 됩시다. 탱크가 들어오면 우리가 나가서 몸으로 막읍시다. 여기 있어도 어차피 죽을 것이니 죽더라도 밖으로 나가서 탱크를 막읍시다. 우리 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일시적으로나마 막읍시다.”
결연한 분위기에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외신기자들이 우르르 행진 대열을 따라왔다. 김천배 광주YMCA 이사가 영어로 외신기자들에게 짧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모두 굳게 입을 다문 채 걸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여명의 거리였지만 길거리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뒤따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수백 명의 대열이 됐다.
윤상원 등 항쟁지도부는 오전 10시 시민궐기대회를 열기로 계획을 하고 곧바로 가두방송에 들어갔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모두 도청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오전 10시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개최합니다. 모두 도청 앞으로 나와 우리 힘으로 광주를 사수합시다.”
오전 9시경, 수습위원들은 금남로-돌고개-농촌진흥원 앞까지 약 4km 구간을 1시간 동안 걸어서 계엄군의 탱크를 비무장 상태로 막아섰다. 도열한 탱크의 포문이 수습위원들과 뒤따르는 시민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고, 탱크 옆에는 총을 든 계엄군들이 실탄을 장전한 채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근처 건물의 옥상 위에도 이미 기관총 총좌를 설치한 계엄군들이 위협적으로 대열을 향해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수습위 김성용 신부와 상무대에 있는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준장이 대치 현장에서 만났다. 김성용 신부는 탱크를 물려달라고 요청했고, 부사령관은 교통 소통을 위한 진입이었다고 변명을 한 후 이를 받아들였다.
시시각각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윤상원은 전홍준 선배를 만나러 사직공원 양파정으로 갔다. “기독교 병원에서 총상을 입은 환자들을 수술하고 상원이를 만나러 잠깐 사직공원 양파정으로 갔는데, 아 그때 상원이를 보고 깜짝 놀랐어. (커피 잔을 들어올리며)상원이 입술이 바로 이 까만 커피색이야. 얼마나 보탰는지 이미 속까지 까맣게 탔어. 어제부터 지도부는 밖으로 나오라고 했는데……결국 못나오고 말았지만.”(전홍준의 증언)
◇기동순찰대를 기동타격대로
26일 오후 2시, 항쟁지도부는 옛 전남도청 2층 기획관리실장실에서 기동타격대를 조직했다. 정상용과 윤상원은 날마다 변두리에서 공수들이 출몰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있고 외곽 지역방위대도 밤낮으로 공수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으니 기동순찰대를 기동타격대로 재편하여 계엄군의 진입에 대응할 수 있게 하자고 말했다.
당시 지역방위대는 화순 너릿재와 증심사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한 태봉·숙실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학운동 지역방위대, 무등산 산장입구 산수동로터리에 있는 산수동 지역방위대, 효촌·남평 길목인 백운동 지역방위대, 송정리·상무대 길목인 농성동 지역방위대, 담양 길목인 두암동 지역방위대, 용전·대전 길목인 오치동 지역방위대, 장성 길목인 운암동 지역방위대가 지역 예비군과 젊은이들로 편성되어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다. 수습위원회는 이들 지역방위대마다 경찰이 쓰던 무전기를 지급하여 상황실과 교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제5차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에 몰려든 예비군
26일 오후 3시, 학생수습위원회 기획위원 이양현은 분수대에 올라갔다. 사회를 맡은 김태종이 마이크를 넘겨주자 이양현은 학생수습위원회를 대표하여 오늘 아침 ‘죽음의 행진’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퇴각, 그리고 이어 상무대에서 김기석 준장과 회담했던 사실을 설명하였다. 김성용 신부가 우리의 요구사항을 전달했으나, 모두 거절했다는 사실과 오늘밤 자정을 기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겠으니 도청을 떠나라고 통보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렸다.
끝으로 이양현은 “우리 시민군은 민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최후의 일 인,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성들과 고등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셔서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라고 마무리 짓고 분수대에서 내려왔다.
순간 분수대 광장은 고요했다. 공수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최후의 일 인, 최후의 일각까지 결사항전하겠다는 학생수습위원회의 결연한 의지가 분수대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민주대행진이 끝난 후, 김상집은 시민결의문 낭독자로서 가두행진을 마친 예비군 300여 명과 함께 도청 정문 앞으로 행진하였다. 5열종대로 행진을 하자 총을 들기를 원하는 시민들이 대오에 합류했다.
특히 고등학생들이 뛰어와 합류했다. ‘예비군가’를 부르며 도청에 도착하여, 모두 정문 앞에 앉아 연좌데모를 벌였다. 예비군들은 ‘군대를 갔다 온 향토예비군들이 무장을 해야 계엄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예비군 설립 취지가 향토를 방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비군은 광주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 총을 달라고 외친 것이다.
‘재무장 결사 항전’ 구호와 ‘우리는 향토예비군’ 등 예비군가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자, 잠시 후 도청 안에서 상황실장 박남선이 나왔다. 박남선은 ‘아직 수습위원회에서 총기를 지급하라는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기 지급은 안 됩니다’고 말하며 향토예비군들에게 도청 정문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흥분한 예비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니가 뭔데 우리 예비군들을 물러나라고 하느냐. 광주는 우리 예비군들이 지키겠다. 너 비켜라. 우리가 직접 총을 가져가겠다.’고 외치며 도청 정문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전남도청 정문이 무너질 듯 삐걱거리자 박남선은 깜짝 놀라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는 하늘에다 총을 발사하며 외쳤다.
‘더 이상 들어오면 쏜다! 쏜다!’
총소리를 듣고 도청 안에서 학생수습위원회 정상용과 이양현, 윤상원이 뛰어나왔다. 300여 명의 예비군들이 광주를 지키겠다며 총을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윽고 정상용과 이양현, 윤상원이 예비군들에게 총기를 지급할 테니 광주YMCA에 가서 기다리라고 약속했다. 이때 이양현이 김상집을 불러 고등학생들을 가리키며 ‘고등학생들은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마지막 재야·학생수습위원회 회의
한편 같은 시각 오후 4시 반경 도청 부지사실에서 재야·학생수습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종기 변호사, 오병문 학장, 김재일, 장세균 목사, 조비오 신부, 조아라 회장, 이애신 총무, 황금선, 구성주, 김화성, 정상용, 김종배, 김창길 등이 모였다. 김창길은 계엄사를 다녀와서 황금선, 김화성, 노수남과 은밀히 만나 도청지도부 전체회의를 열어서 무기반납을 결의하자고 합의를 했다. 이들이 곧장 수습위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전체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유지인사라며 나섰던 수습위원들은 김창길의 의견에 적극 동조를 했고 재야수습위원들도 이미 예정된 진압작전이면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뜻으로 전체회의에 참석했다.
이 시각 윤상원과 이양현은 김상집과 예비군들을 달래느라 도청 정문에 있었다. 만약 이대로 총기회수만 계속하다가는 도리어 예비군들의 기세로 보아 도청을 강제로 점령할 것만 같았다. 이때 윤강옥이 뛰어와 김창길 등이 회의를 소집해 무기반납을 결의하기 위해 재야수습위원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윤상원 일행은 급히 1층 상황실로 들어간 박남선을 데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수습위원 회의실인 부지사실로 들어갔다. 박남선은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들고 천장을 향해 한 발을 발사한 다음 악을 썼다. ‘누가 우리들과 협의도 없이 무기를 반납하려 해! 어떤 놈들이 우리를 계엄군에 팔아넘기려 하느냐 말이야! 싸울 사람만 남고 항복할 사람은 나가라’고 강경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김창길과 황금선 등 무기 반납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회의실을 떠났다.
김창길등 투항파가 도청을 떠나자, 자리에 남아 있던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다. 한 차례 고성이 오간 다음 투항파가 떠난 데다 대학생 시민군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정상용이 주재하였다. 이미 계엄군 진입이 예견되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짧게 끝났다. 이 회의에서 학생수습위원회를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단지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이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학생수습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종배가 정상용이 맡았던 외무담당 부위원장이 되는 것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결사항전을 결의하게 된다.
/김상집 (사)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