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신건호의 서치라이트] "응답하라" 초등생이 선생님 구타…‘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신건호(남도일보 전남 동부권 총괄취재본부장)

2023-10-03     신건호 기자

세상이 왜 이럴까. 교사를 구타한 학생이 이번에는 초등학생이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5분 동안 선생님을 괴롭혔다. 거리는 흉기 들고 설치는 ‘멘탈괴물’ 때문에 불안하다. 마약은 우리 이웃까지 왔다.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든지를 테스형!(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가수의 노랫말처럼 세상살이가 좌불안석(坐不安席)의 형국이다.

세상을 힘들게 하는 원인은 분명하다. 국정을 논해야 할 지도자들은 싸움닭으로 변해 뭐든 쪼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키우고 있고, 그 추종자들은 독오른 벼슬을 치켜세워 자기편(自己便) 편들기에 하루해가 짧으니 그렇다. 원로들은 원로들대로 화가 나 있고, 학부모의 등쌀에 밀린 선생님들은 “절벽에 매달려 있다”고 하소연하는 시국이니, 어찌 “하루라도 평안한 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탈 하냐?”는 인사가 무색할 정도로 극과 극을 치닫는 난투극 현상이다.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것은 헬리콥터 맘(Helicopter parent)이 만든 결과다. 헬리콥터처럼 떠다니며 자식 일에 간섭하면서 ‘상대를 이겨야 성공’이라는 ‘1등 만능주의자’를 길렀고, 그렇게 자란 아이는 지도자가 됐어도 상대를 인정하기는커녕, 자기가 ‘옳다’는 주장만 하고 있으니 갈등이 커진 것이다. 학교 교육도 다양한 생각을 하는 ‘측면사고’(側面思考)를 하는 아이보다는 공부만 잘하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을 키워 버렸다.

변해야 한다. 유대인처럼 아이들 교육이 ‘측면사고’를 하도록 변해야 사회가 불안하지 않다. 유대인들은 아이의 재능에 맞는 교육, 창의력(Lateral thinking)을 기르는 교육을 하지만 ‘최고’가 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최고’는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강요하는 순간, 창의력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대를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로 보는 인성교육은 기본이고 개개인이 남과 다른 ‘달란트(talent)’가 있다고 믿고 아이가 가진 ‘개성이 1등’이라는 교육철학을 지킨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스필버그, 키신저, 엘빈 토플러 같은 명인을 배출했다. 노벨상 수상자 23%가 유대인이다. 그들은 ABC, CBS 방송과 뉴욕타임스라는 세계 4대 일간지를 만들었고 우주산업을 주도하는가 하면, 컴퓨터와 인터넷을 만든 주역이 됐다. 콜라, 청바지, 껌도 그들의 작품이다.

취재차 만난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는 “남과 다른 개성(unique personality)이 1등”이라고 했다. ‘측면사고’를 존중하면 아이들 눈에는 또 다른 면(standpoint)이 보인다고도 했다. 이런 교육으로 호기심 많던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를, 남과 다른 생각을 사업과 연계한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청바지를 만들었다. 수천 번의 실험을 거쳐 소아마비 백신을 발견한 에드워드 솔크도 같은 부류다.

1873년 특허를 받은 청바지 모티브는 엉뚱하게도 금광(金鑛)이다.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바지가 금방(今方) 구멍이 나자 한 청년이 천막 천으로 질긴 바지를 만들었다. 이게 돈이 됐다. 돈 때문에 전국에서 광부들이 모였지만 정작 돈을 번 사람은 ‘측면사고’로 광부의 바지를 만든 유대인이었다.

‘측면사고’ 교육의 또 다른 본보기는 솔로몬이다. 아기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솔로몬은 아기를 칼로 잘라 나누어 갖도록 한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아이가 죽어야 하는, 이건 답이 아니다. 통상적 사고로는 먼저 아기가 누구랑 닮았는지를 판단하는 게 우선이지만 솔로몬에 판단 기준은 ‘측면사고’로 접근해 “누가 더 아이의 안전을 원하는가”였다.

‘생각의 힘’을 쓴 에드워드 드 보노는 “문제를 조금만 벗어나면 심취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했다. 괴벨스가 가짜뉴스를 탓하는 현실이지만 드 보노의 ‘6가지 생각모자’를 통한 ‘측면사고’로 보면 단식을 하는 이유, 이념을 말하는 의도, 교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 등등 모두 다 보인다.

가짜뉴스 ‘원스트라이크 아웃’ 발언만 해도 ‘측면사고’로 접근하면 침이 튀는 방향은 진보언론이고 보수언론은 중립적이라는 모순된 판단이 깔려 있다. “언론이 민영화되면 공정해 진다”는 억지 논리도 보인다.

지금 대한민국은 ‘측면사고’ 교육부재의 부작용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사회불안을 일으키고 있다. 녹취록 인터뷰 관련자를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이라며 반역죄로 모는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내가 당했으니 ‘너는 더 당해야 한다’는 오기심보가 놀부의 혹처럼 생겨나고 남 탓으로 돌리는 ‘유체이탈 화법’이 상대를 깔보는 화술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 노출된 아이들이 뭘 배우겠는가!

상대를 인정해야 갈등이 사라진다. 그래야 불안이 제거되고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리 힘들어”라는 말이 없어진다. 갈등을 끝내겠다는 의지가 1이라도 있다면 “응답하라”고 묻기 전에 지도자 스스로 ‘측면사고’를 하는 게 옳다. 측면을 못 보면 정면이라도 똑바로 보는 것이 정치다. 현실과 괴리(乖離)가 있는 ‘유체이탈(遺體離脫) 화법’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재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