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으로 되짚어보는 5·18항쟁 (20·끝)님을 위한 행진곡

죽음 이겨내고 탄생한 ‘넋풀이’…전세계 민주화운동 상징 황석영 이훈우 전용호 오정묵 김은경 등 계엄군 총탄에 스러진 영령 위로하고자 5·18 2주기 맞아 문화패 노래굿 준비 김종률, 김민기 만난 뒤 자작한 노래집서 한 곡씩 불러가며 ‘임~행진곡’ 8곡 선곡 광주가 미래세대 희망 주는 노래 필요성에 느린 가락 가다듬어 현재 행진곡풍 곡 탄생 카세트 테이프로 2천여개 녹음 전국 확산

2023-10-11     김명식 기자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5·18 2주기를 앞두고 황석영을 중심으로 한 문화패가 시민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넋풀이’ 노래굿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노래굿에 포함된 곡 중 하나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오정묵 김은경 임희숙 등이 메인보컬로 참여했으며, 카세트 테이프 녹음과 대학가 노래굿 등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사진은 (사)윤상원기념사업회 주최·남도일보 주관으로 올해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5·18평화음악회에서 출연진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는 모습./남도일보 DB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김종률 작곡, 백기완 작사, 황석영 개사

‘님을 위한 행진곡’은 김종률이 작곡하고, 백기완의 묏비나리를 황석영이 개사한 노래다. 김종률은 1979년 제3회MBC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으로 은상을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된 전남대생 이훈우는 5년 후배인 김종률을 주목하고 스스로 매니저를 자청했다. 김종률은 이훈우로부터 소개받은 책을 읽고 여러 선배들을 만나면서 차츰 한국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절망의 도시 광주에서 김종률은 절망을 노래하고 작곡하기 시작했다. 1980년 가을, 김종률과 이훈우는 ‘공장의 불빛’을 작곡한 김민기가 머물러 있는 김제를 찾아갔으나 자리에 없어 메모만 남기고 돌아왔다. 김민기는 1978년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노래극으로 만들기 위해 광주를 찾았다가 녹두서점에서 박기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영결식에서 최초로 ‘상록수’를 부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훈우는 김민기와 인연이 있었다. 이후 김종률은 김민기를 자주 만나 김민기의 음악세계를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김민기는 김종률의 멘토다. 김민기도 김종률을 기대했다. 1980년 12월 25일 김종률이 ‘제2회김종률작곡발표회’를 할 때 김민기는 손수 무대와 음향을 맡아주었다. 발표회가 끝나자 김민기는 김종률에게 ‘기타를 가지고 증심사 계곡 모처로 오라’는 메모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진혼곡

김민기는 “여기는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살았던 무당골이란 곳이야. 수십여 가호가 이 무당골에서 무허가로 살다 다 쫓겨났어. 그때 박흥속이가 철거반원 넷을 죽였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지. 그 현장이 바로 여기야.” “박흥숙이가 어제 죽었어야.” 김민기가 허공을 바라보며 독백하듯이 말하며 “어제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됐어.” “나는 이제 노래 안 한다. 그냥 빈민운동 할 거야. 노래운동은 이제 네가 해라.” 그리고는 떠나버렸다.

영문을 모르는 김종률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죽음이 무엇이길래 저토록 허무에 빠졌는가. 노래운동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김민기가 햇병아리인 자신더러 노래운동을 하라고 하지를 않는가. 영혼이 싹 빠진 듯 허물어진 김민기의 모습은 내내 김종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김종률은 존경하는 멘토 김민기가 남긴 “이제 노래운동은 네가 해라.”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나태해질 때마다 자신을 다그치며 작곡에 전념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메인보컬 오정묵.
임을 위한 행진곡 메인보컬 김은경. 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임을 위한 행진곡 메인보컬 임희숙.

◇합동 창작

1982년 4월 17일(토), 5·18광주민중항쟁 2주기를 앞두고 황석영은 김종률에게 기타와 자작곡 노래집을 가져오라고 요청했고, 이훈우, 전용호, 오정묵, 임영희, 임희숙, 김은경, 윤만식, 김옥기, 김영희, 김선출 등을 운암동 자택으로 소집했다. 황석영은 모인 좌중에게 “5·18광주민중항쟁 2주기를 맞이하여 문화패인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문을 뗐다.

김종률은 그 자리에서 지난 2월말에 윤상원과 박기순이 영혼결혼식을 치렀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을 논의한 뒤 일행은 민주주의를 외치다 계엄군의 흉탄에 스러진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넋풀이’ 노래굿을 만들기로 했다.

김종률은 1980년 12월 25일 김민기와 헤어진 후 틈틈이 작곡한 노래집에서 한 곡 한 곡 선곡하여 일행 모두 돌아가며 불러보았다. 그렇게 그 노래의 곡과 가사에 어울리는 사람을 정했다. 이쯤되면 사실상 합동 창작인 셈이었다. 마침내 8곡을 뽑았다. 그러나 무언가 빠진 느낌이 있었다. ‘넋풀이’가 그냥 넋풀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희망을 주어야 했다. 모두들 광주의 영혼들이 미래세대에게 희망을 주는 행진곡풍의 노래가 있어야 한다고 하자, 김종률은 1980년 12월 25일 무등산 무당골에서 김민기와 헤어진 후 줄곧 입안에 맴돌았던 단조풍의 느리고 장중한 가락을 다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길고 느린 가락이었지만 반복해서 불러가며 차츰 리듬을 좁히자, 드디어 두 시간 만에 일행 모두가 만족하는 지금의 곡조를 얻게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 창작을 총지휘한 황석영.

◇‘묏비나리’는 ‘우리 강산을 위한 기원’

황석영은 어디선가 종이문서를 들고 와서는, “가사가 뭐 별 거 있다냐?”하고 독백하더니 가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가사를 보고는 모두들 감탄했다. 그리하여 당시 일행 모두는 황석영 소설가가 ‘님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작사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사의 구절구절이 백기완 시집 “젊은 날”에 수록된 ‘가신 님’, ‘우리들의 합창’속에 흩어져 들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그때부터 ‘백기완 작시(作詩)’라고 노래책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0년 12월에 나온 시집 ‘젊은 날’의 증보판에 ‘묏비나리 -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라는 장시가 실림으로써 이 노래의 가사가 백기완의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이 장시 ‘묏비나리’는 1980년 12월에 씌여졌다. 백기완은 감옥 안에서 ‘묏비나리’ 몇 구절을 입으로 웅얼대다가 잊어버리기도 해서 깨알만한 글씨로 종이에 쓰기 시작했단다. 이걸 숨기려고 시 몇 편을 적은 종이를 사타구니에 끼어놓고 지내다가 감옥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묏비나리’는 고문 현장과 감옥에서 완성된 시인 셈이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이 시를 처음 쓸 당시를 회상한다. “그건 내가 입으로 쓴 시야. 입으로 웅얼대면서 감옥 천장에 눈으로 쓴 시야.” ‘비나리’는 ‘빈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손을 모두어 비는 행위를 일컫는다. ‘묏비나리’는 ‘우리 강산을 위한 기원’의 뜻이라 할 수 있다.

◇김은경, 박현정, 은신성, 정현순 최초 공연 이후 전국 확산

‘넋풀이’ 노래굿은 황석영이 총연출 및 감독을 맡은 셈이다. 조연출은 전용호가 맡았다. 전용호는 ‘넋풀이’ 제작을 위해 카세트 녹음기 준비부터 참가자들을 모집하고 역할 분담을 하는 모든 일을 전담했다.

군 입대를 앞둔 김종률은 작곡 및 기타를 담당했다. ‘갈릴리’라는 운동권 문화패에 몸담으며 노래와 마당극을 통해 5·18을 알리던 오정묵은 당시 ‘님을 위한 행진곡’ 뿐 아니라 ‘젊은 넋의 노래’, ‘에루와 에루얼싸’ 등 넋풀이 수록곡 중 3곡의 메인보컬을 맡았다. 1년차 교사였던 임희숙은 오정묵과 메인보컬을 담당, 박기순 열사 어머니 역을 맡았다. 서울 한신대학원을 다니는 김은경 역시 보컬을 담당했다. 김선출은 꽹과리를 쳤으며 윤만식은 징을 쳤다. 이훈우는 카세트녹음기를 이용해 2천여 개의 녹음테이프를 만들었다.

김은경은 ‘넋풀이’ 노래굿을 제작하자마자 등교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다음 주가 한신대학교 4·19축제기간(한신대는 4월 19일이 개교기념일이어서 축제가 4월 19일에 시작됨)이었기 때문에 학교축제기간에 ‘넋풀이’ 노래굿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엄혹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제목을 ‘넋풀이’로 하지 못하고 ‘거기 사람이 있어요?’로 하게 되었다. 김은경은 ‘넋풀이’ 노래굿을 함께 녹음하면서 노트에 일일이 곡을 세밀하게 적어놓았다. 그 곡들을 타이핑해서 박현정, 은신성, 정현순 등에게 나눠주어 ‘넋풀이’ 노래굿을 연습하였다. 이삼 일 연습한 다음 ‘거기 사람이 있어요?’라는 노래극을 했지만 실상은 ‘넋풀이’를 최초로 공연한 것이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영혼결혼식에서 김상윤이 제를 올리는 모습./(사)윤상원기념사업회 제공

◇죽음을 이겨낸 시민군의 행진곡

‘넋풀이’ 노래굿 테이프는 녹음에 녹음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시민군의 모습은 총칼로 억압하는 독재권력 앞에 선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입에 맞서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계엄군의 진입상황을 알리는 방송을 했을 때, 새벽공기를 가르는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서 ‘젊은 넋’의 죽음에 꼼짝도 하지 못했던 광주시민의 마음이었고, 이어서 죽음을 이겨낸 많은 시민군을 만들어냈다. 마침내 자식을 잃은 어미의 ‘넋풀이’는 계층을 뛰어넘는 국민항쟁이 되어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었다.

1982년 2월 20일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낭독한 추모시 ‘부활의 노래’는 문병란 선생님의 시로 6번 곡에 실려 있다. 이로 인해 ‘넋풀이’ 노래굿에는 ‘빛의 결혼식’이란 부제가 따라다녔고, 지금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상징하는 곡이 되었다.

나아가 1980년대 이후 민주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집회 때마다 국민의례에 상응하는 ‘민중의례’라는 새로운 의례를 자발적으로 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민주열사에 대한 묵념을 실시하는 것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홍콩, 미얀마 등지에서 지금도 투쟁현장 마다 불리는 노래로 전 세계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김상집 (사)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