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건호의 서치라이트]"응답하라" 뉴진스 디토를 선거에 도입하면 ‘맹구’ 아닌가!
신건호(남도일보 전남 동부권 총괄취재본부장)
[신건호의 서치라이트]"응답하라" 뉴진스 디토를 선거에 도입하면 ‘맹구’ 아닌가!
“Oh say it ditto”(‘나도’라고 말해줘) “Want you”(널 원해) “So say it ditto”(너도 그렇다고 말해줘) 걸그룹 뉴진스의 ‘디토’(ditto)가사 일부다.
나처럼 너도 좋아한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공감과 동의를 구하는 노래다. 강요인 듯, 요구인 듯, 반복된 가사로 인해 중독성이 있는 이 곡은 아이돌 단일 곡 중 1일 최대 스트리밍을 기록한 세계적인 인기곡이다.
‘디토’(ditto)는 라틴어로 ‘공감’의 뜻이다. ‘나도’ 이하동문(Me too)이라는 의미와 비슷한 단어로 다소 생소하지만 뉴진스의 노래가 히트하면서 ‘콘텐츠디토’ ‘디토소비’같은 새로운 트랜드로 우리 곁에 와 있다.
‘디토소비’는 제품을 구매할 때 유명인의 취향에 따라 그 사람이 사용하는 제품을 ‘나도’(ditto)하며 따라 구매하는 소비 형태다.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이유가 선택의 주요한 포인트로 작용한다.
최근 이 같은 소비 형태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피곤하고 귀찮게 여겨서 “본인의 판단보다 대리체가 제안하는 것을 마냥 옳은 것으로 믿고 따라서 구매하는 것”인데, 다소 충동적이고 맹목적이라 볼 수 있다.
맹목적(盲目的) ‘디토’(나도)는 위험성이 매우 높다. 권모술수가 난무한 정치에서는 더욱 그렇다. 존중과 상생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맹이 없는 껍질을 보이며 구매(지지)해 달라는 선동은 그렇다 치고, 지지자들의 무리한 ‘디토’(나도)유도는 사회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되고 있다. 계파의 장(長) 곁에서 호위무사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망나니를 연상케 할 정도다. 그건 아니지 않으냐고 따지면 ‘민심’을 들먹이며 “그게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난리다.
‘팬덤 정치’를 극단으로 끌어들여 정치를 나락(奈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줄 세우는 ‘디토정치’의 한계”다. 이를 이끈 주역들은 ‘다름을 다르다’고 인정하지 않는 데 익숙하다. 내민 것은 오리발이 많다. ‘정적’에 대한 증오를 강하게 표현하는 메시지를 던져야 장사가 잘 되는 줄 안다. 어쩌면 그것이 극단 지지자들로부터 ‘교주’의 지위를 인정받는 자양분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무소불위의 극치(極致) “MBC 잘 들어” ‘칼틀막’ 충성이 그것이다.
‘극진’ 또는 ‘극보’ 스피커로 불리는 양극단에 있는 선동가는 정적에 대한 증오를 먹고 사는 ‘팬덤 정치’의 자극제이자 흥분제다. 우선해야 할 팩트 체크보다는 AI처럼 외부 입력에 의존하다가 ‘아니면 말고’ 식이다. 이들이 만든 결과는 늘 실망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정치혐오를 파는 간신(奸臣)이 분명하다.
‘디토’의 계보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탐욕을 위해 부(富)를 쌓고 자기 사람을 심으며, 정적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 모사꾼인 간신들, 권력자에 붙어 ‘나도’를 외친 그들이 바로 ‘디토’자다.
유자광만 해도 그렇다.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남이(南怡) 등을 반역으로 몰아 죽였고, 신진 사림파를 제거하며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 자기가 모시던 연산군 폐위 때 코믹 프로그램 봉숭아학당의 ‘맹구’처럼 손을 번쩍 들고 ‘나도’(ditto)를 외치며 변절했다. 세조부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다섯 왕 곁에서 ‘디토’ 간신의 첨단을 보였다.
임사홍은 어떠했는가? 정치적 파란만장(波瀾萬丈)을 겪다가 연산군 측근으로 발탁되더니 윗분을 폭정과 향락에 빠지도록 부추기며 권세를 누렸다. 생모(生母)의 원수를 갚겠다며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을 등에 업고 ‘나도’(ditto)하면서 자기 복수를 하지 않았는가! 묻히는 건 민심이었다.
결국 유자광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고 임사홍은 중종반정 때 반정군에 처형됐다. 죽어도 편히 죽지 못한 참시(斬屍)까지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선택에 있어 최선을 택하는 일이다. 주위에서 그러니 ‘나도’ 그러겠다는 것은 선택의 금물(禁物)이다. 지나친 팬덤으로 선택의 기회를 놓치면 남는 건 후회다. 그래서 급(急)하다. 총선을 앞두고 “맹목적 추종은 아닌지?” “존재감 천대(賤待)의 아이콘 ‘지역감정’에 휩싸이지는 않은지?” 자기검열이 시급하다. 그래야 잘못된 결과에 대한 회피(回避)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가 아닌 ‘나의’ 존재를 알리는 선택, 선거에서의 ‘디토’는 뉴진스 ‘디토’와는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정책 승부로 ‘본보기의 삶을 살아 온 멘토(mentor) 같은 후보’를 가려내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충동적 ‘디토’는 나와 국가를 망치는 행위다. 정확한 판단을 하는 ‘선택의 용기’는 그래서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역사는 준엄하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그 시대의 국민도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준엄한 심판을 앞둔 지금,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방향키를 어디로 돌려야 하는지? 스스로 “응답하라”고 말하고 “답”해야 한다. 최선 아니면 차선이라는 선택지가 있는데도 선동에 따라 저돌(豬突)을 발휘하는 것은 ‘맹구'와 같은 행동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