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10화]천지인(天地人) 236 춘화추실(春花秋實)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

2024-09-05     남도일보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

다른 해보다 유난히 햇볕 따갑고 무더운 그해 여름이 가고 팔월 중추절(仲秋節)이 지나가 날씨가 서늘해졌다. 여기저기서 농부들이 추수(秋收)하느라 일 바쁜 철이었다. 황금 물결 일렁이는 들을 바라보면서 조대감은 춘화추실(春花秋實) 계절(季節)이 오가는 이치(理致)를 잠시 음미(吟味)해 보는 것이었다. 인생(人生)도 그와 같이 잠시 꽃 피는 향기(香氣)로운 청춘(靑春)이었다가 이내 시들어가는 가을이 되면 결실(結實)을 하고, 또다시 올 한해를 기약(期約)하며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던가? 머리칼이 하얗게 새어버린 이즈음이면 가슴에 맺힌 것일랑 죄다 풀어버리고 한 올 티끌일랑 남겨두어서는 아니 되었다.

조대감은 햇살 맑은 어느 날 아침, 말 등위에 백냥의 엽전(葉錢)을 싣고 화향옥(花香屋)을 향해 길을 떠났다. 파직당해 쫓겨오는 신세였으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으나 그리운 화선(花鮮)이 발걸음을 다시 하게 했던 것이었다. 그 얼굴을 한번 보고 남은 회포(懷抱)를 풀고 와야 했던 것이었다.

하루 종일토록 말을 타고 조대감은 겨우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석양 무렵 화향옥에 당도했다. 화향옥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건재(健在)하였다. 조대감이 화향옥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주인 여자가 알아보고 허리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반갑게 맞았다.

"아! 아이고! 사또 나리! 어, 어인 발걸음이신지요?"

"그 그래! 잘 있었는가? 지나가다 하룻밤 유(留)해 가려왔네!"

조대감이 말을 하며 말 등위에 싣고간 돈 자루를 방안으로 들여오게 하고는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걸게 차린 주안상(酒案床)이 들어왔다.

"이리 앉거라! 술 한잔 받거라!"

조대감이 주안상을 들고 온 중년의 주인 여자를 자리에 앉게 했다.

"아! 예! 사사 사또 나리!"

중년의 주인 여자가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앞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조대감이 술을 부어 주며 말했다.

"그래! 편히 받거라! 그런데 화선이는 그동안 잘 있느냐?"

"사또 나리께서 떠나시고 몇 달 동안 시름시름 앓아눕더니, 겨우 몸을 회복(回復)해 일어나 지금은 잘살고 있습니다"

"으음! 그랬구나! 나는 내일 새벽 일찍 날이 밝기 전에 떠날 것이다. 내가 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화선이를 조용히 불러오너라!"

조대감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예예! 사사……사또 나리! 그 그리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