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10화]천지인(天地人) 238 애정실상(愛情實狀)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

2024-09-09     정희윤 기자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측간 머리에서 우연히 두 여인의 소리를 다 들은 조대감은 순간 끓는 분노보다는 극한 허무감(虛無感)이 가슴을 사정없이 감아 도는 것이었다. 배신감(背信感)과 극한 울분(鬱憤)이 들끓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서글픈 눈물이 가슴 가득 일렁이는 것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젊고 싱싱한 남녀의 사랑이란 것이, 결국 현실 속에서는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깊은 자괴감(自壞感)이 일렁이는 파도처럼 삽시간에 밀려와 조대감을 단박에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졸지에 이빨 빠진 호랑이에 버림받은 패잔병(敗殘兵)이 되어버린 조대감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크게 울부짖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성난 호랑이처럼 눈을 부라려 뜨고 사납게 호령하며 화선을 붙잡아 들여 분풀이하며 볼기를 때릴 수는 더더욱 없지 않은가! 지금 조대감의 신세는 그야말로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던가!

조대감은 조용히 소변을 보고는 소리 없이 화향옥 방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 쓰라린 속으로 조대감은 술을 계속 들이켜는 것이었다.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화선을 데리러 갔던 중년의 주인 여자 기녀가 들어오더니 조대감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이구! 사사 사또 나리!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화선이 이곳에 없어 집으로 찾아갔더니 먼 고을에 사시는 외삼촌께서 돌아가셨다는 급보(急報)가 와서 부모님을 모시고 급히 갔다고 하옵니다! 이를 어쩌지요! 아! 아이구!……"

"그래! 그렇구나! 내가 날짜를 잘못 잡아 온 것이 아니더냐? 그만 앉거라! 고생이 많았다! 술 한잔 받거라!"

조대감이 말했다. 사태를 미리 알고 있는 조대감은 모든 것을 체념(諦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날 밤 그 중년의 주모(酒母)와 밤늦도록 술을 나누면서 가지고 간 돈 백 냥을 화선에게 전해 주도록 이르고는 잠깐 잠자리에 든 조대감은 날이 밝기전인 새벽녘에 얼른 일어나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보름 후 화선에게 전해 주라고 주고 온 돈 백 냥이 그대로 거기서 보낸 늙은 종자(從者)의 손에 들려 고스란히 다시 돌아왔던 것이었다. 화선은 조대감이 주고 온 돈조차도 냉정하게 뿌리쳐 버렸던 것이었다.

돈과 지위와 권력에 의하여 거래(去來)되고 사정없이 난도질당하는 겉만 번지르르 그럴싸한 사랑 타령이라는 것의 허구를 화선이 깊이 깨달아 안 까닭이어서였을까? 그러기에 화선은 돈으로도 지위로도 권력으로도 아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조대감에게 분명하게 증명(證明)해 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조대감은 뒤늦게 그런 사랑의 허실(虛實)을 깊이 생각해 보고는 애정실상(愛情實狀) 인생허무(人生虛無)를 깊이 실감(實感)하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