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이어온 ‘호국명가(護國名家)’ 장흥고씨-(하)일제강점기 고영완·완남 오누이
엄혹한 일제강점기 독립투쟁하다 모진 고초 일본 유학·이화고등여학교 재학중 비밀결사 조직 ‘조선학생 동지회’ 결성 전라도 책임자로 조직 확대 위해 힘써 1941년 일경에 붙잡혀 1년 6개월 투옥 1960년대 정부 독립유공자 포상도 거절 "무엇을 바라고 독립투쟁 한 게 아니었다"
◆ 반일 학생 비밀결사 ‘조선학생동지회’ 결성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우리의 독립군 기지마저 초토화한 일제는 만주 지역에서 군사력을 확장하다가 마침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난징대학살’을 감행, 중국을 유린하고 동남아 진출을 꾀하고자 했다. 이에 앞서 일제는 1936년 8월 조선군 사령관과 관동군 사령관을 역임한 미나미 지로(南次?)를 제7대 조선 총독으로 보내 황국신민화 정책을 펴던 1939년 12월, 일제의 엄혹한 시기에 연희전문학교 학생 8명, 도쿄 유학생 4명 등이 모여 반일 학생 비밀결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가 결성됐다.
◆ 조선학생동지회 전라도책임자로 활약
조선학생동지회는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로 하고, 거사일을 1942년 3월 1일로 정했다.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냉천동약수터·연희전문학교 뒷산·벽제관 등 각지에서 모여 독립투쟁 의지를 북돋우며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는데, 이 단체의 전라도책임자로 활약한 사람은 전남 장흥 출신 고영완(高永完, 1914-1991), 그의 여동생 고완남(高完男, 1920-1991, 일명 永南)이었다. 이 단체가 결성될 당시 고영완은 일본 도쿄 센슈대학에 유학 중이었고, 고완남은 이화고등여학교 졸업반이었다.
그런데, 1941년 7월 함경남도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오누이는 그해 9월에 서울 본정경찰서(현 종로경찰서) 일경에 붙잡혀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그해 12월 19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돼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오빠는 징역 1년이 선고됐으나 구류 기간이 통산돼 형을 받지 않은 여동생과 함께 풀려났다.
◆ 호국의 명가 장흥고씨 오누이
투옥된 지 1년 6개월 만에 초주검 상태에서 풀려난 고영완은 고향에서 분루를 삼키고 몸을 추스르며 틈틈이 나무를 심었다. 그는 광복 후 초대 장흥군수, 한국민주당 중앙집행위원, 대한민족청년단 장흥지단장,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장흥지부장 등을 역임했고, 장흥에서 2대와 5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타계했다.
#"고영완은 원래 타고난 약체(弱體)에다 고문이 무지막지하게 거칠게 집행돼 (그 후유증으로) 결국 타계했는데, 숨을 거두기 직전, ‘조국의 앞날이 무한히 걱정돼 눈을 감지 못하겠다.’하고 눈물 흘리니, 이런 애국자는 세상에서 찾기 힘든 진정한 애국자였다."(‘조선학생동지회약사’ 72쪽) 라고, 동지였던 윤주연(尹柱淵)은 회고했다.
한편, 고완남은 이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한 1941년 봄 김성수 둘째 아들 김상기와 혼인했는데, 그해 9월에 붙잡혀 모진 고문으로 유산되는 등 1년 6개월 동안 고초를 겪고 1943년 3월 17일 오빠와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임신할 수 없게 되자 가문의 후사를 위해 1957년 스스로 요청해 이혼하고 독신으로 살다가 1991년 친정에서 별세했다.
1960년대 들어 정부 당국에서는 조선학생동지회 사람들에게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라고 했으나 모두 그 요청을 뿌리쳤다가 1977년에야 포상을 받게 됐다.
#"우리가 독립투쟁을 했던 것은 무엇을 바라고 했던가?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함이지 다른 명리를 취하고자 함이 아니었네."(‘조선학생동지회약사’ 72쪽)
그러나 오누이는 끝까지 포상을 신청하지 않았는데, 오빠는 공직을 거쳤기에 그 인적사항을 알 수 있어 동료 중에 포상을 신청해 1980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나 여동생은 포상을 신청하지 않겠다고 해 그 뜻을 따랐는데, 당신이 타계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 친정 조카 고병돈이 고모의 삶이 헛되이 묻힌 것을 안타깝게 여겨 포상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일제강점기 엄혹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두 분은 임진왜란 의병장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의 15대손으로 일제침략기 호남의병장 녹천(鹿川) 고광순(高光珣)과 함께 장흥고씨이니, 어찌 호국의 명가가 아니랴!
/이태룡(국립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장/문학박사)
정리/오승현 기자 romi0328@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