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이정학의 ‘신비한 자연속으로’][203] 멸강나방
나방 한녀석 관찰도 힘든데 짝짓기 광경 목격 행운이… 나방 날개 회색빛 도는 황갈색 중실에 옅은 가락지·콩팥무늬 시정 부근엔 흑갈색 빗금무늬 특이한 국명…연관성 찾기 어려워 애벌레, 화본과 주 먹이로 살아 땅속 번데기 후 10일 전후 우화
영하로 곤두박질 치던 기온도 조금 올라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나 싶었는데 비온 뒤 바람이 정말 매섭다. 형형색색의 낙엽들은 고운 자태를 뽐내며 버티다 차가운 바람결에 속절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군상들의 발길 아래 애처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바스러진다. 이렇게 겨울은 어느새 우리곁에 와 있고,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
거의 모든 애벌레들이 번데기가 되어 깊은 동면에 들어간 요즘은 산에 가도 별 재미가 없다. 물론 나무들의 겨울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한참 관심을 가지고 재미를 붙일 때의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다. 항상 손에서 도감을 놓질 않고 옆에 두며 눈으로 마음으로 익히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열정이 조금은 식은 것 같다. 그러나 보니 평소 잘 알고 있었던 나무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금 게으름을 피우고 방심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그렇다.
나방도 마찬가지다. 요즘 들어 거의 보이질 않으니 차에서 카메라를 꺼낼 일도 없다. 사무실 주변에서 한 개체라도 보이면 사진으로 담고 동정하기 위해 도감을 펼쳐 여기 저기 보면서 다른 녀석들도 눈맞춤 할텐데 그럴 일이 점차 줄고 있다. 큰일이다.
아산시 영인면에 있는 사무실에서 빤히 올려다 보이는 산이 있다. 고용산이다. 해발 300m가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주변에 큰 산이 없으니 꽤 높아 보인다. 대충 봐도 참나무류가 많아 보여 애벌레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곳으로부터 날아왔을 것 같은 나방들도 많았다.
2024년 5월 18일, 새로운 녀석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잔뜩 기대하고 고룡사를 출발해 고즈넉한 산길을 올랐다. 먹은 흔적들은 많은데 애벌레들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검스레집명나방, 금빛노랑불나방, 신갈애기잎말이나방 애벌레 등 몇 녀석만을 만날 수 있었다. 아직 5월 중순이지만 너무 덥다. 목도 축이고 더위도 식힐 겸 나무그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웬 나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일단 앵글에 담고 다른 각도에서 담기 위해 나뭇잎을 살짝 들어 올리니 한 마리가 아니다. 짝짓기중이다. 밤에 불을 밝히지 않으면 나방을 보기도 결코 쉽지 않은데 짝짓기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날개는 회색빛이 도는 황갈색을 띠고, 중실에 옅은 가락지무늬와 콩팥무늬가 선명하게 보인다. 물론 개체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시정 부근에는 흑갈색 빗금무늬도 있다.
집에 와서 도감을 찾아보니 밤나방과의 멸강나방이다. 날개길이는 36~39㎜ 정도다. 4~10월에 관찰 가능한 녀석이다. 국명도 참 특이하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일 수가 없다. 어른벌레나 애벌레 등의 사소한 특이점이라도 이름에 들어 있으면 조금이라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텐데….
어른벌레도 어렵게 만났는데 애벌레는 지금껏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노랑줄꼬마밤나방 애벌레를 멸강나방 애벌레로 잘못 동정하기도 했고, 북극선녀밤나방 애벌레 역시 멸강나방 애벌레로 이름 붙여 놓기도 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자위해 보기도 한다. 결국 허운홍 선생께 부탁해 애벌레 사진을 받았다. 유충의 색은 변이가 많은데 잎에 새로로 붙어서 가로로 깨끗하게 먹는다. 대부분의 애벌레들과 마찬가지로 방해를 받으면 곧 땅으로 떨어져 버린다. 화본과를 주 먹이식물로 살아가는데 때로는 대발생해 벼과식물에 큰 피해를 주어 잎들이 거의 남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 자란 애벌레는 땅속에 들어가 번데기가 되고 10일 전후로 우화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월동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유충시기는 6~7월로 알려져 있으니 내년에는 꼭 찾아봐야겠다.
글·사진/이정학 숲 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