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데스크 시각]비상계엄으로 드러난 우리의 민낯

박형주(남도일보 지역사회부장)

2024-12-19     박형주 기자

 

박형주 남도일보 지역사회부장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선언이 있었던 지난 3일 밤 10시 30분쯤.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 내려진 청천벽력같은 포고령에 온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다.

우리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날벼락을 맞아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고, 거기에는 광주광역시든 전라남도든 일선 지자체도 마찬가지였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계엄 선포 직후 각 실·국 과장급 직원에 대한 소집요청을 안전상황실을 통해 문자로 전달했다. 4일 자정쯤 강 시장과 국장들은 시청 소회의실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비상계엄에 대한 향후 대책 마련을 위한 의견을 나눴다. 과장급 직원들은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각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시의원, 5개 구청장, 지역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 대학총장 등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비상계엄무효 선언 연석회의’를 열어 약 1시간에 걸친 회의결과, 이번 비상계엄 사태는 반 헌법적인 비상계엄으로 무효라는 결론을 내렸다. 강 시장은 오전 2시56분 공식 담화문을 통해 "비상계엄은 무효임을 선언하며 국회 의결에 따라 즉각 해제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회의나 담화문 발표는 정무적인 판단에 따른 임기응변식 대응일 뿐, 공식적인 매뉴얼에 따른 후속 조치가 아니다.

전라남도도 현 직원들 입장에서 사실상 처음 겪는 비상계엄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전라남도에 따르면 비상계엄이 선언된 시각 전남도 실·국장 30여 명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서는 이 소식의 진위를 파악하는 모습으로 뒤숭숭했다. 급기야 명창환 행정부지사가 "11시반까지 실·국장들은 도청으로 모이라"고 지시하자 그때서야 심상치 않은 사태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실·국장들은 처음에는 행정부지사실에서 모였다가 20층 비상상황실로 자리를 옮겼다. 11시 40분쯤 김영록 전남지사도 도청에 도착했다. 도청 간부진은 우선 향후 일정 중단 여부와 국회 해산 여부, 도의 대응책 등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검토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도청 간부는 "‘계엄사령관이 닥치면 지사님이 체포될 수 있으니 우리끼리라도 보호해야 하지 않나, 어디로 피신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오갔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청사 경호 인력을 총동원해 청사 출입구 방호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도청 간부진도 비상계엄 사태는 처음 겪는데다 대비 매뉴얼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광주나 서울, 경기 등 타 시·도들에 연락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물어봤다. 부지사는 다른 시·도 부지사들에게, 실·국장들도 타 시·도 간부진들에게 서로 문의하는 식이었다.

비상계엄에 대한 전라남도의 입장 발표도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발표하자, 도청 간부진도 비슷한 방식이 좋겠다고 지사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김 지사가 입장문을 발표하기 약 10분 전쯤인 1시 1분쯤 국회에서 비상계엄 철회 요구안이 가결됐다. 행정부지사가 이에 ‘상황 해제’라고 단톡방에 남기면서 도청 간부진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처럼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민낯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계엄 관련 매뉴얼이 없다는 것이다. 천재지변이나 전시 등 각종 재난사태에 대비해 우리 정부는 매뉴얼을 갖추고 있다. 그래야 비상상황에 질서 있게 대비하고 우왕좌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엄법 7조에는 ‘비상계엄의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의 모든 행정 사무와 사법 사무를 관장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 행정기관과 의회의 구체적인 임무 등을 규정한 조항이 없다. 전라남도 관계자는 "비상계엄 관련 매뉴얼이 없어 행정안전부의 조치를 기다렸다"고 지난 3일 밤을 회고했다.

계엄 관련 매뉴얼이 갖춰지지 않기는 사법부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지난 9일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계엄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의 필요성을 인식했다"고 밝혔다. 황인서 법원행정처 기획총괄심의관은 이날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출석해 법관 대표들의 관련 질의에 "법원에 전시 상태 매뉴얼은 있었으나 비상계엄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재발할 경우 체계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계엄에 대비해 지자체 등 공공기관별로 각각 매뉴얼을 마련하거나, 계엄법이나 지방자치법 등 관련법을 개정해서라도 시스템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44년 만에 부활한 망령이 언제 다시 살아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