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9장] 영광·함평·나주·무안 동학농민군(148회)
순간적으로 기습한지라 정만기는 꼼짝없이 붙잡혔다. 붙들린 채 그가 그의 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수성군 너그들 이놈들을 향해 총을 쏘아라. 나 죽어도 괜찮응개 쏴부러! 이것들을 잡아부러야 난리가 평정된다마다."
하지만 부하들은 이쪽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쏠 수가 없었다. 총을 쏘면 동학군을 죽이지만 정만기 수성통장 역시 죽게 된다. 저들을 살리는 한이 있더라도 부하들로서 수성통장을 죽여선 안되는 것이다.
"못쏘것구만이요."
담벼락 너머에 있던 수성군 조장이 소리쳤다. 김석돌이 정만기를 때려눕혀 입을 틀어막고 끈으로 묶은 다음 동학군 진영으로 끌고 갔다. 수성군들은 수성통장이 인질로 잡혀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볼 뿐, 대거리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공격하면 대장이 죽거나 다칠 것이 빤하다. 다만 대장이 끌려가도 되살아나올 것이라 믿었다. 동학농민군이 집결해있는 마당으로 끌려온 정만기 수성통장이 그들을 향해 꾸짖었다.
"너희 놈들, 수성통장을 욕보이겠다는 것이냐? 무슨 천벌을 받을라고 이 지랄이냐? 당장 풀어주지 못해?"
"너는 디졌어."
한 농민군이 정만기의 쌍통을 날리자 그가 묶인 손을 헤집어 곁에 서있는 농민군 병사의 총을 가로채 쌍통을 갈긴 농민군 병사를 향해 쏘았다. 병사가 고꾸라져 죽자 다른 병사가 달려들어 죽창으로 그의 복부를 쑤셔박았다. 정만기의 몸통에서 콸콸 핏물이 쏟아져 나오더니 그는 이내 숨을 거두었다.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화진이 다가가 정만기의 부릅뜬 눈을 손으로 쓸어 감겨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수성통장으로서 자기 직무를 충실히 했다. 적으로 만났지만, 우리가 세상을 평정하면 훌륭한 장수로 쓰일만한 인물이었다. 섭섭하지 않게 장례를 치러주도록 하자."
그 사이 수성군사들이 도망을 갔다. 본래 함평현아의 수성군은 정예군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동학 교세가 드세니 함평현은 젊은 장사들을 공모해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휘자가 죽으니 명령 체계가 허물어져 갈팡질팡하더니 끝내 각자도생으로 탈주해버린 것이었다. 지체있는 부호나 향교 유림들도 숨었다. 함평현은 졸지에 공동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이화진, 장공삼, 임종량의 진두지휘 아래 함평현아를 손쉽게 접수했다. 함평현감 권풍식이 현아에 머물러 있다가 동학군에게 관청을 물려주었다.
"내가 순순이 현아를 물려준 이상, 더 이상 백성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백성들은 주군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너희 동학의 백성도 아니더냐."
그는 어떻게든 백성들의 희생을 막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수천의 농민군사를 오륙십 명의 수성군으로 막을 수 없다는 현실적 인식이 있었지만, 애초에 그는 싸움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항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로 그는 나중 조정으로 호출되었다. 금부도사가 달려와 그를 한양으로 압송해간 것이었다. 의금부 옥방에 갇히자마자 그는 떡실신이 되도록 맞았다.
"권풍식, 너 또한 동학 비도 무리와 한 패거리가 아니더냐?"
의금부의 취조관이 다짜고짜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그들과 한 무리가 아니라 분명 함평현의 현감이다."
"현감이란 자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직접 대적하지 않고, 힘이 부족하면 증원군을 불러야 하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홍계훈 양호초토사의 중앙군과 강화병, 보부상병이 전라감영군과 함께 영광땅까지 내려갔는데 부르지 않고 미적거렸다. 그러다가 함평 수성통장 정만기를 죽이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코 니놈이 적도(敵徒)와 한통속이 되어서 나온 참화다. 그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피를 부르면 읍내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인즉, 모든 사람들이 그 꼴을 보고싶어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들은 다독여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강압적으로 탄압해서 얻은 것이 뭐냐. 매년 전국적으로 사오십 건씩 발생하는 민란은 모두 탄압해서 생긴 화근이었다. 근본을 해결하지 아니하고 마구잡이로 쪄누른다고 해서 되는 세상이 아니다. 저들도 이제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막가는 인생이라고 대든다. 그러므로 대화와 타협은 굴종이 아니란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