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 본 남도 세상 10] 여름에 가고픈 섬, 신안 흑산면(4) - 가거도
신안군 흑산면 끝자락 숨은 보석, 대한민국 최서남단.. 가히 거할 섬
가거도(可居島)라는 이름은 한자로 ‘가히 거할 만한 섬’이라는 뜻으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섬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가가도(佳嘉島), 가가도(可佳島), 가가도(家假島)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모두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섬’이라는 공통된 의미를 담고 있었다.
1896년 이후 현재의 가거도(可居島)로 불리기 시작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소흑산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2008년 원래 이름인 가거도로 공식 환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과 시간의 경계에 선 특별한 섬
목포 여객선터미널에서 가거도까지는 고속페리가 운항하고 있어 약 4시간 10분이면 오고 갈 수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의 끝자락에 자리한 가거도가 최근 여행객들 사이에서 ‘숨은 보석’으로 주목받고 있다.
가거도는 행정구역상 1구 대리마을, 2구 향리마을, 3구 대풍리마을로 나뉘어 있다. 단순한 여행지를 넘어 자연과 시간의 경계에 선 섬으로서, 바다와 산, 마을과 등대가 어우러진 이곳은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조용한 위로와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가거도항이 위치한 대리마을을 중심으로 관광객 증가로 민박과 편의시설이 점차 확충되고 있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지속가능한 K-관광 섬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117년 역사의 바다 길잡이, 가거도 등대
등대를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대리마을 민박집 차를 이용하여 굽이굽이 대풍리로 조심히 내려와 등대까지 갈 수 있었다. 1907년 12월 첫 불을 밝힌 가거도 등대는 무인등대로 시작해 1935년 유인등대로 전환됐다.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 제380호로 지정된 이 등대는 동중국해와 서남해를 오가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가거도리 북쪽 끝에 자리한 이 등대는 단순한 항로 표지를 넘어 바다와 시간, 건축과 문화가 교차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대한제국 시대 전형적인 양식에서 현대적 구조로 변화한 과정을 보여주는 등대 건축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등대에서 바라본 서해바다는 넓게 품어주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섬등반도
섬등반도는 가거도 북서쪽에 있는 반도형 지형으로, 섬 서쪽 끝에서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지형이 마치 바다로 향하는 악어의 등줄기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섬등반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이곳은 2020년 8월 국가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기암절벽과 주상절리가 조화를 이룬 해식절벽의 웅장한 경관이다.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어떤 사진으로도 그 감동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특히 해가 늦게 지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방문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선사한다.
섬등반도 끝자락에는 ‘송년우체통’이 설치되어 있어 새해 소원을 담은 엽서를 보낼 수 있는 낭만적인 체험도 제공한다. 또한 이곳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중국과의 무역을 위한 중간 기항지로 활용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해상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온 것이다.
#‘작은 산토리니’ 대풍리 마을
가거도 3개 마을 중 등대와 가장 가까운 3구 대풍리 마을은 섬의 동북쪽 끝자락에 있는 작은 어촌으로, ‘작은 산토리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3구 대풍리는 가거도 3개 마을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바닷가 급경사를 따라 하나둘씩 내려선 가옥들에는 풍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낚시도구를 옮기는 데도 도르래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험준한 지형 조건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대풍리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바닷가 급경사를 따라 계단식으로 형성된 마을은 푸른 지붕과 하얀 집들이 바다와 어우러져 그리스 산토리니를 연상시키는 풍경을 자아낸다.
약 10여 가구의 주민들이 미역 채취, 낚시, 민박 운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민박은 조용한 쉼터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가거도 출장소 앞 김부련 열사 추모비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4·19 혁명’의 함성이 서울 거리를 울렸다. 그 역사적 현장에서 이승만 정권 퇴진을 외치다 경찰의 총탄에 쓰러진 열아홉 살 청년 김부련이 있었다. 1942년 가거도 대리에서 태어난 김부련 열사는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서울에서 학업에 매진하면서도 방학이면 교통이 불편한 가거도로 돌아와 후배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단순히 시위에 참여한 학생이 아니라 고향을 사랑하고 예술의 꿈을 품었던 따뜻한 청년이었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신안군은 2013년 가거도 출장소 앞에 김부련 열사의 흉상과 추모비를 건립했다. 또한 가거도항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김부련 하늘공원’을 조성해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김덕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