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 본 남도 세상 23] 강진만, 춤추는 갈대와 가을 이야기
강진과 인연을 맺은 지 35년이다. 카메라와 함께 강진만 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20만 평에 펼쳐진 갈대밭이 물결을 이룬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바람이 불어와 갈대가 일제히 소리 내며 춤을 춘다.
나에게는 강진만과 관련하여 남도의 풍경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세 곳이 있다. 바로 장흥과 강진을 잇는 탐진강, 아홉 물줄기가 모여드는 구강포, 그리고 생명의 보고 강진만과 가우도이다.
# 탐진강, 구강포, 강진만
탐진강은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발원해 강진만에 다다른다. 과거에는 예양강, 수령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지금의 탐진은 옛 지명(탐진현, 현재의 강진)에서 비롯되었다.
탐진강변에는 보림사와 같은 천년 고찰, 시를 읊던 정자들이 줄지어 있어 선인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여름이면 은어와 피라미가 헤엄치는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지역민과 관광객에게 도심 속 휴식을 제공하면서 강진만으로 흘러든다.
구강포는 탐진강을 비롯해 장계천, 강진천, 도암천 등 여러 하천이 흘러들어 형성된 포구다. ‘구강포(九江浦)’라는 이름은 아홉 개의 강이 모여든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구강포는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걸었던 20리 길의 시작점이자, 백련사와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갯벌과 섬, 산과 평야가 어우러진 풍경은 남도의 멋이다.
# 새벽안개 속에서 피어나는 강진만 생태공원
이른 아침, 강진만 생태공원에 첫발을 디뎠다. 강진만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갈대밭을 감싸고 있어 카메라 셔터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안개 사이로 솟아오르는 해가 갈대 끝을 황금색으로 물들인다. 이슬에 젖은 갈대는 아침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탐진강의 하구에 있는 강진만은 생물다양성 지역으로, 국립생태원 조사에 따르면 강진만 일대에 1,572종의 생물이 서식한다. 20만 평의 갈대 군락지와 청정 갯벌은 천연기념물 제201호 큰고니의 월동지로 유명하다. 큰고니를 비롯한 철새들의 집단 서식지로, 생태 교육과 관광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강진만 생태공원은 자연훼손을 최소화하며 조성되었고, 남포호 전망대와 백조다리 등에서 갯벌과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생태체험관에서는 4D 영상으로 수달과 삵, 고니의 모험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강진만 생태공원에서 갈대 사이를 걷다 보면, 여행을 넘어 삶의 여유와 사색을 만날 수 있다.
하늘에서 본 생태공원은 탐진강과 구강포, 강진만이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사이로 커다란 하얀 고니가 보여 신비감을 준다. 고니를 비롯한 철새들이 갯벌에서 먹이 활동을 하다가 순간 갈대밭 위를 날아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아침의 생태공원은 사람의 손길이 닿기 전, 자연 그대로의 숨결이 살아있다.
# 갈대와 음악이 빚어낸 ‘춤추는 갈대 축제’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강진만 생태공원에서 제10회 강진만 춤추는 갈대 축제가 오는 10월 25일부터 11월 2일까지 9일간 개최된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문화·생태 축제’를 주제로, 생태와 예술, 가족이 함께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꾸며진다고 한다.
축제 기간 방문객들은 강진만 생태 탐방로 걷기, 자전거 무료 대여, 버블 매직쇼, 가을 음악 버스킹, 어린이 싱어롱쇼 등 다양한 공연과 체험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업사이클링 체험, 한국민화뮤지엄과 협업한 민화 전시, 그리고 베트남인의 날 in 강진 등 글로벌 문화 교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눈길을 끈다.
벌써 ‘춤추는 갈대 축제’라는 이름답게, 아카펠라의 청아한 선율이 갈대숲 사이로 들려오는 듯하다.
해 질 무렵, 갈대밭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서쪽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갈대는 황금빛에서 붉은빛으로 시시각각 색을 바꾼다. 노을을 배경으로 역광 사진을 찍으면 갈대 이삭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뒤로는 불타는 듯한 하늘이 펼쳐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가 물결치듯 흔들리고, 그 움직임이 노을빛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어낸다.
강진만 너머로 지는 해가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면 갈대밭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노을을 배경으로 그림자처럼 새겨질 것이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갈대밭은 또 다른 표정을 짓는다. 황혼의 푸른빛이 감도는 시간, ‘매직 아워’다. 하늘은 깊은 남색으로 변하고 갈대는 검은 실루엣이 된다.
# 다산의 숨결 따라 걷는 강진 사의재
밤이 되면 사의재,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 첫발을 디딘 그곳에 가봐야 한다. 복원된 동문매반가 주막 앞에 카메라를 든다. 작은 골방, 그곳이 다산의 서재였다. ‘사의(四宜)’ 생각은 맑게, 말은 적게, 행동은 무겁게, 더욱 무겁게. 네 가지 덕목이 현판에 새겨져 있다.
마루에 앉아 사의재를 바라본다. 남도의 인심과 철학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다산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 남도의 보석, 가우도(駕牛島)
강진만 한가운데 떠 있는 유일한 유인도, 가우도. 섬의 형태가 마치 소의 멍에와 비슷하다고 하여 ‘가우도’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작은 섬은, 다른 섬과 다르게 배가 아니라 도보교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특징, 이름처럼, 이곳은 남도의 보석이다. 저두 출렁다리를 건너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에 카메라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망호 출렁다리까지 이어지는 ‘함께해(海)길’을 따라 걷자,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청자타워에 올랐다. 또 다른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 성벽에 새겨진 600년의 시간, 강진 병영성
강진에서 광주로 오는 길에 병영성 돌담을 따라 걸었다. 1417년 태종의 명으로 축성된 병영성, 조선 시대 육군 총 지휘부의 위엄이 성곽에 배어있다.
1,060m의 성벽을 따라 걸으며 총안에 담쟁이를 보며 셔터를 눌렀다. 전라도와 제주 53주 6진의 병력을 지휘하던 이곳은 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어 복원 중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경장으로 폐영되었지만, 성곽은 꿋꿋이 남아 역사를 증언한다.
네덜란드인 하멜이 1656년 표류 후 제주·전라도 일대에서 억류되었으며, 강진 병영에 약 7년간 유배되었던 곳이다.
매년 4월 열리는 병영성 축제 자료 사진을 살폈다. 무예 시연과 퍼레이드로 옛 군영의 기상을 되살린다. 나막신을 신고 성곽을 달리는 아이들, 역사를 체험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들판에서 바라본 병영성과 수인산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김덕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