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43회)

2025-10-12     윤태민 기자

 

하인들이 떼거리로 동학농민군에 합세한 곳이 광주목의 북녘 마을들이었다. 그중 저불마을이었다. 광주목의 외곽 경방천과 용봉천이 합류하는 왕개 윗녘에 저불마을이 있었다. 저불마을은 용주, 봉곡, 청계마을과 함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으려는 형세를 가진 곳이라고 하여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고, 무인(武人)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궐기하고, 명문가들이 득세한다는 고을이었다.

이 고을에 세상을 호령하는 부호가 많은 것은 영산강의 넓은 유역과 섬배미, 여시박골 등지에 기름진 평야가 즐펀하게 널려있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저불마을에 만석군 이우석이 살고 있었다. 논과 밭이 많아 하인이 일백에 이르렀다.

저불마을은 수백년 전 함풍(함평)이씨가 들어와 살고 있는 고을이었다. 마을 이름이 저불인 것은 적불(笛吹, 赤불)이란 이름이 차후 부르기 편하게 전화(轉化)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임진왜란 전부터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한 함풍 이씨 이백춘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이백춘은 1537년 광주 방혜마을(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임동)에서 태어난 인물로 학문이 출중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1558년(명종 13)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조선왕조의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직에 임명되었다. 사옹원은 왕의 수라와 대궐 내 음식을 관장하는 관서여서 실권이 강한 자리였다.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지 않으면 왕의 수라와 왕실 조정의 취사를 담당할 수 없는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도망가면서 잠시 평양에 머물렀을 때, 사대부는 물론 실무진까지 모두 도망을 갔다. 그런데도 이백춘은 사옹원을 사수하며 직원들과 함께 왜군에 저항하다가 사로잡혀 끝내 임금의 처소를 알리지 않고 버티다가 1592년 9월 22일 죽임을 당했다.

이백춘이 고향에서 학자로서, 부호로서 뿐아니라 급제 후 왕조의 중요 신분으로서 이름을 날리는 한편으로 그의 사촌 아우 이방주(1542~1597)가 과거시험 3등에 급제하였다. 이방주가 금의환향할 적에 광주목 관아에서 내어준 말을 타고 관모를 쓰고 종가(宗家) 사당으로 향하는데, 말의 진행 양옆으로 축하 사절들이 도열해 따르고, 그 뒤로 피리와 나팔을 부는 취주(吹奏) 공연단이 따랐다.

그 이후 문과급제자가 금의환향한 마을이라 하여 ‘나팔과 피리를 접어 분다’는 의미로 적취, 적불(笛吹, 赤불)이라고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적불은 또 영산강 상류에 이백춘의 기상과 의절을 상징하는 붉은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다고 하여 한자로 ‘적불(笛吹, 赤불)’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부르기 쉽게 전화하여 1960년대까지 저불이라고 불렀다.<‘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일부 인용>

이방주 또한 의절이 뚜렷하고 호국정신이 분명한 문신이었다. 과거 3위 급제한 뒤 대동찰방(大同察訪:평양 지방행정과 민정을 규찰하는 기관)을 비롯하여 무장현감, 고부군수 등 외직(外職)을 두루 거쳤다. 공평무사한 행정 수행으로 부임지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미암 유희춘, 송강 정철 등 당대의 정객들과 교류하며, 당시 지배층의 정치사상인 도학(道學:성리학 또는 주자학)을 전파하고 실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우다 왜군 척후병의 기습에 사촌 형 이백춘에 이어 장렬하게 순절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지역 유림들이 들고 일어나 대대적으로 의병활동을 벌인 기폭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사백 년 후 이백춘·이방주의 후손 이우석 또한 가문의 영광을 이어받아 수천석군의 부호로서 덕망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이응서가 문제였다. 천하에 없는 난봉꾼인 것이다. 좋게 말하면 풍류객이고, 나쁘게 말하면 하릴없는 건달이었다. 기생을 불러다 춤추며 엉기고, 노래하며 즐기는 따위 잡기에 능하였다. 기생들을 데리고 주유천하 하기를 한 해에도 몇 차례 씩 하고 있었다.

"이놈을 어떻게 하면 훼차리게(정신차리게) 할꼬."

아비 이우석은 노심초사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