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44회)

2025-10-13     윤태민 기자

 

아들이 정신없이 떠도는 것이 난세에 절망한 탓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방탕을 자기합리화하는 것일 뿐, 그럴수록 학문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 이우석의 생각이었다. 그는 독수공방하는 며느리가 무엇보다 보기가 민망하였다. 며느리는 장성 하서(河西) 집안의 명문가 출신 여식이었다. 근동 고을을 호령하는 김 진사의 외동딸인 것이다.

"조상만 한 후손 없고, 애비만한 자식 없다더니 응서 이놈을 두고 하는 말이던가. 사돈어른을 뵐 면목이 없승께 나가 면이 서들 않구먼."

아비 이우석은 탄식하였으나, 며느리 김도향은 그런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김도향은 이응서보다 네 살 위인 여자로 열일곱 살의 이응서와 스물한 살 적에 혼인하였다. 당시 풍속으로는 처녀들이 열일곱이나 열여덟에 시집을 가는데 삼사 년 늦게 시집을 간 것은 김 진사의 애지중지 아끼는 외동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진사는 시대 풍속이 허락한다면 딸아이를 평생토록 옆구리에 끼고 살고 싶었다. 금지옥엽 키운 딸자식이 남의 집안에 들어가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때로는 자식의 어미로서 똥 기저귀를 빨며 살아가는 것이 두고두고 마음이 애잔하였다.

김도향은 어느 날 마당으로 나와 집을 나설 채비를 하였다.

"봉덕아, 나귀를 끌고 오거라이."

봉덕은 그녀가 아끼는 하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부려왔으니 두세 살 나이가 많았어도 늘 하대하였다. 시아버지 이우석이 툇마루로 나왔다.

"어디 나들이하려고?"

시아버지라고 했지만 자식이 그 모양아니 며느리에게 면이 서지 않아 그는 늘 죄짓는 기분이었다.

"그냥 친정에 갔다와얄랑만이요."

"그래 가봐야제. 춘부장 어른도 뵈어야 할 때가 됐승깨."

그녀가 나귀에 오르려 하자 하녀 춘심이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아씨, 나도 따라가고 잡어라우."

유별나게 젖이 큰 큰애기였다. 매사 깔깔거리기를 좋아하는데, 남자 하인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따랐다. 춘심이가 그런 것을 더 즐기는 것 같았다. 일을 매시럽게 한다고는 했으나 김도향은 그런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가고 잡으면 따라와."

춘심이가 헤헤 웃으며 봉덕에게 야릇한 눈길을 보냈다. 김도향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햐였지만 봉덕은 춘심이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귀에 오른 김도향은 봄바람이 시기할 정도로 향긋한 향기를 품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영산강의 지류를 타고 장성 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답답한 시가에서보다는 한결 기분이 상쾌하였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가슴 설레었다. 여전히 어머니 품도 그리웠다.

천보산이 장정 이십여 명을 이끌고 작은 고개에 이르렀을 때, 나귀를 타고 고개를 오르는 김수향 일행을 발견하였다. 남자 하인이 나귀의 고빠를 집고 앞서 걷고, 나귀 뒤에는 여자가 보퉁이를 이고 쫄랑쫄랑 따르고 있었다. 나귀에 탄 여인은 자태가 곱고 우아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들을 살펴보던 한 장정이 천보산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광주목의 이우석 부호의 며느리 같소야."

"장성 김진사 외동딸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남편이 천하에 없는 난봉꾼이오. 저런 여지를 납치해 불면 군자금깨나 털 수 있소."

천보산이 장정을 빤히 노려보았다. 장정이 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천보산을 보며 공연히 찔리는 태도를 보였다.

"너는 생각이 도둑질하는 것밖에 모르느냐?"

"좋은 기회가 왔승깨요. 그 아들이 난봉꾼인지라, 건드려도 상관없어라우. 털면 쇠푼깨나 만질 것잉만이요."

천보산이 당장 그의 목을 쳤다.

"우리가 강도 짓으로 사는 것이 아닐진대, 이런 자는 용납할 수 없다. 어떤 뛰어난 무술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벌써 한참 지나쳐가는 나귀를 따라붙어 일행 앞에 우뚝 섰다. 천보산의 부하들이 뒤따라와 나귀를 에워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