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45회)
천보산이 나귀를 끌고 가는 봉덕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행차들인고?"
봉덕이 천보산을 쳐다보는데 얼굴이 좀 익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알은체를 하려고 했는데 그가 금방 장정 하나 간단없이 해치운 것을 보고 마음이 졸아버린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저 거시기, 마, 마님 친정을 가는 중이고만이요. 마님을 모시고요."
"친정? 친정이 어딘디?"
마상에서 녹색 장옷을 머리에 쓰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도향이 살짝 장옷 사이로 드러난 천보산을 살폈다. 우람한 체격에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산도적 놈 같았으나 착한 면도 있어 보였다. 김도향이 도리어 당당하게 물었다.
"가는 길을 막은 자는 누구신가?"
그러자 춘심이가 용기를 내어 "길가는 사람을 왜 맬겁시 건드요?" 하고 대들 듯이 따졌다. 천보산이 그 말을 묵살하고 장정들에게 명했다.
"모서라."
"이러면 안 되어 라우."
춘심이 울상을 지었지만 장정들이 봉덕을 제치고 나귀 고삐를 잡더니 산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에말이요 야, 왜 그러요? 우덜은 죄가 없고, 마님은 지체 높은 분이어라우."
그러나 장정들은 춘심이 말을 무시하고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갈재 방향으로 가긴 가는데 백양사 쪽 험한 산중으로만 가는 것이다.
나귀 위에서 김도향이 소리쳤다.
"멈춰라. 너그들 불한당인가? 산적들인가? 납치하는 것인가?"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끌려가던 봉덕이 그제야 생각이 나는 듯 물었다.
"혹시 흥덕 사는 천보산 장사 아니오? 맞지라우? 씨름판에서 봤소."
천보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짐승들조차 머물 것 같지 않은 깊은 산중에 이르니 엉성한 초막이 몇 채 나타났다. 바로 그들의 웅거지였다.
"내리시오."
천보산이 김도향을 향해 명했다. 김도향이 나귀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천보산의 뺨을 후려쳤다.
"네 이놈! 니깟 것들이 나를 납치한다고 한들 나로부터 어떤 것도 취할 것 같으냐?"
화를 낼 줄 알았던 천보산이 뺨을 맞은 채 한동안 서있다가 초막을 향해 소리쳤다.
"저불마을의 이 씨 집안 며느리 옳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얼굴이 히어 멀쑥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젊은 남자가 나왔다. 그를 본 봉덕이 먼저 놀라고, 김도향도 소스라쳐 놀랐다. 춘심이는 까무러치듯 소리치다가 울었다.
"이이고메 우리 서방님, 작은 나리님, 여그가 어딘디 여그 계신게라우?"
바로 도향의 남편 이응서였다. 천보산이 말했다.
"도처에 도적떼들이 할 거 하고, 민심마저 사나웅깨 길이 험할 깨비 안내하려고 했는디, 마침 응서 대장의 부인이신지라 모셨습니다."
김도향이 놀란 가운데 설움 같은 것이 복받쳐 올라 소리 내어 울었다. 이응서가 아내를 달랬다.
"미안했소. 그동안 고생했소. 할 말은 차차 할팅개 고정하시오."
이응서가 김도향을 껴안으며 위로하자 그녀가 더욱 서럽게 울었다. 이응서가 천보산에게 주변을 정리하라는 눈짓을 보내고, 숲의 빈터가 고요해지자 도향을 초막 안으로 들였다. 천보산이 봉덕과 춘심이를 다른 초막으로 안내하였다.
"서방님, 어떻게 되는 것이어요?"
이응서의 품에 안기긴 했으나 너무도 돌연한 사건 전개인지라 김도향은 어리둥절하였다. 이런 험한 산중에서 남편을 만나다니, 꼭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궁금하였을 것이오."
이응서는 더 이상 말이 없었으나 김도향은 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세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초월자 같은 모습인 것이다. 기름진 쌀밥에, 매일 고기 반찬에, 비단옷에, 그리고 수십 명의 하인들을 거느리고 떵떵거리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무슨 곡절이 있길래 험한 산중 냄새나는 초막에서 거렁뱅이처럼 비천하게 살고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도박이나 기생질로 방탕한 오입쟁이 오명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깊은 산중에 은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