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47회)

2025-10-15     윤태민 기자

 

이응서가 곁에 있는 아내 김도향에게 낮은 목소리로 소개했다.

"백양사 만덕 스님이요."

일행들이 만덕 노스님을 에워싸고 풀밭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만덕 스님이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숫자에 대해 말하고 싶네. 우리가 흔히 숫자가 많다는 표현으로 ‘억(億)’이라는 수(數)를 쓰는디, 이것을 ‘억수로 많다’ 라고 표현하게 되네. 그란디 알고 보면 억보다 훨씬 더 큰 수들이 또 억수로 많다는 걸 아셔야 하네. 혹시 그 수치를 아시는 사람 있는가?"

장정들이 대답 대신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젖다가 노스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억의 만 배를 조(兆), 조의 만 배를 경(京)이라고 하네. 또 경의 만 배를 해(垓), 해의 만 배를 자, 자의 만 배를 양(壤)이라고 하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세. 양의 만 배가 구(溝), 구의 만 배가 간(澗), 간의 만 배가 정(正), 정의 만 배가 재(載), 재의 만 배가 극(極)이란 말이시. 그렇다고 여기가 끝인가. 그것도 아닐세. 불가에서는 극의 억 배가 항하사(恒河沙)라고 하네. 지구의 모든 강과 바다의 모래알의 숫자와 같다는 뜻이지. 항하사의 억 배를 아승기, 아승기의 억 배를 나유타, 나유타의 억 배를 불가사의라고 하네. 그란디 또 여그가 끝이 나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여. 불가사의의 억 배가 무량수라고 한다네.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한다는 수라는 뜻일세.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를 여러분 혹시 아시는가?"<화엄경, 아비담론 및 옮겨온 글 일부 인용>

모두가 서로를 마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수의 무량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노스님이 말을 계속했다.

"세상에는 어렵고 험한 일이 많네. 그럴수록 일희일비 말고, 지치지 말고, 두려워 말고, 절망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라는 뜻일세. 혁명은 성공하는 사례가 많지 않네. 사실은 실패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혁명이여. 왜냐. 상대방은 너무나 많은 힘을 가지고 있으니께. 권력, 자본, 무기 따위 견고한 기득권의 모든 자원을 가지고 있으니께, 맨주먹으로, 정의감으로 부딪친들 과연 성공할 수 있겄는가. 그래서 실패하더라도 지치지 말고, 무량수와 같은 영겁이 세월을 믿고 밀고 나가라는 말이시. 당장 성공하지 않으면 어떤가. 그 정신이 긴 강물처럼 면면히 이어지면 그 다음 세대가 물려받아 달려가면 되는 것을… 이렇코롬 길게 생각하고 지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일어서 나가라는 뜻일세."

좌중이 숙연해졌다. 노스님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계속하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억은 0이 여덟 개고, 조.경.해.자.양.구.간.정.재.극.항.아.나.불.무량수에 이르기까지 0이 4백 개, 아니 4천 개, 4만 개가 넘을 수 있네. 이 엄청난 수의 세계를 알고 나면 60년도 못 사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하잘것없고 허무하고 쓸쓸한가. 그렇다면 주어진 이 삶을 무의미하게 보내야 할 것인가. 한 인생의 일생이란 세월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이여. 이 무변광대한 우주, 이 무량대수의 장대한 시간 속에서 그저 찰나에 찰나, 그 찰나에 찰나, 또 그 찰나에 찰나, 이렇게 무한 반복되는 찰나에 왔다가 찰나에 가는 우리의 인생이 뜻 없이 살다가 가는 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쓸쓸한가. 이러한 삶의 촌음성이 바로 인생의 참 가치를 규정하는 근본이고, 사유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장정 몇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르며 합장하였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여기 모인 젊은 농민 여러분, 우리가 뜨거운 만남과 뜻을 함께 하는 인연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 하네. 이 넓은 대명 천지 간에 이 땅에 태어나서 그 짧은 삶을 사는 동안 세상사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만나 서로 뜻을 규합한다는 것, 그것은 확률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불가사의한 인연법의 성과물이여.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그래서 찬란한 인생의 대서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인연법으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여기 모인 것으로 알고 있는 바이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