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53회)
점잖은 말로 한량이지 기실은 난봉꾼에 도박꾼인 이응서가 아내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마을에 돌고, 머슴들이 달려 나와 반기었다.
"서방님이 철들은 개비여."
그러자 그렇지 않다는 대꾸가 나왔다.
"아니여. 이번에는 무얼 뜯어갈랑가 몰라. 이러다 기왓장까지 남아날지 모르것당게. 대감마님이 을매나 속을 끓일지 모르겄어. 자식 하나 잘못 둔 불찰이 평생에 화건지구먼이."
"그래도 남을 괴롭히는 양반은 아니잖여?"
"대대로 물려온 가산을 축내는 것이 나쁘제. 돌아왔다 하면 기둥뿌리 하나가 뽑혀나가봉게 반갑도 안 할 것이여."
"연로하신 부모님 애간장을 태울 것잉께 지켜보는 우덜도 마음이 지랄 같구만이요."
"느자구야, 너스레 그만 떨고 니 걱정이나 해라."
자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인 대감 이유구가 이응서를 불러들였다.
"정신이 있는 것이여? 없는 것이여?"
넙죽 엎드려 절하는 이응서의 등을 뚫어져라 살피며 이유구 어른이 타박했다. 이응서는 대답 대신 절을 마치고 아버지의 신수를 살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인지라 부친은 이마의 주름이 깊고, 팔자 주름도 깊에 패였다. 은연중에 송구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 보탰다.
"아버님 건강을 살피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이유구는 대감 벼슬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근동에서는 지체와 권위를 인정해 그에게 대감 마님으로 불렀다. 이유구는 사방팔방 쏴돌아다니는 아들이 괘씸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난세에 얼마나 절망하였으면 산천 주유로 마음을 달랠까 하는 연민이 들었다.
"바람의 아들인가. 구름의 인생인가. 이리저리 싸돌아 댕기면 상놈이나 진 배 없제. 상놈이 별것인가. 하기 나름이제."
그러자 이응서가 거두절미하고 답했다.
"상놈이라니요. 아버님, 마침 잘 됐습니다. 쌍것이라는 노비들을 모두 풀어주겠습니다."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이유구가 아들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여? 니가 떠돌더니 머리가 좀 가부렀는가."
"머리가 간 것이 아니고요, 세상이 변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결정? 니가 무슨 권한으로. 수천 석 마지기 농사는 누가 짓고?"
"정당한 값을 매겨줘야지요. 일용직이든, 월봉직이든 새경이든 정당히 계산하여 노동 값을 지불해야지요."
"나가 지불 안했가니?"
"밥만 멕여주었지요. 저것들이 무지랭이라고 밟고 품삯이라는 것을 지불하지 않았잖아요."
"다른 지주들보다 낫게 해주었다. 밥 잘 먹여주고, 그런 한편으로 하인들을 때린 적도 없다. 잘못했다고 사형(私刑)을 내린 것을 보았느냐. 근동에서는 이 씨 집안의 인심이 크다고 소문이 난 걸 모르느냐?"
"선의로 보살펴준 것은 좋으나 제도로써 보호해 주어야지요. 세상이 달라진 것 모르십니까?"
"세상이 변해도 금도라는 것이 있다. 하인들을 그지없이 따뜻하게 대하고, 넉넉하게 밥을 멕여주고, 고된 일도 공평하게 정해주는 것, 그것이 양반 자제가 해야 할 도리고, 하인을 관리할 덕목이로다."
"아버지, 개인적 인정 여부로 하인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아버지 같은 인자한 사람은 하인들을 잘 대해주지만, 불량한 주인은 개 패듯이 패면서 가혹하게 일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개화된 한 학자의 책을 인용하였다.
"한 개화된 학자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늘, 동학으로 말하면 시천주께서 천부의 자유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시천주가 누구여?"
"아버지로 모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가 나 말고 또 있다고? 에끼 천불 맞을 놈들."
"육체적으로 낳으신 부모가 계시지만 영적인 아버지가 있습니다."
"영적이고 육적이고 아버지는 오직 나 한 사람이여. 떠돌더니 너도 상것이 되어가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