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54회)

2025-10-27     윤태민 기자

 

이응서는 아버지의 완고함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번 성격 규정을 하면 수정할 수 없는 독특한 유림의 세계. 그들은 변화를 경계한다. 변화하면 나라가 무너지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었다. 시천주의 사상을 접한 그로서는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진리에서 양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천주 아버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면서 귀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만인이 공평하다는 것이지요. 자유가 없으면 생명은 빛날 수 없다구요. 빛 속에서 자태를 드러내듯이 자유는 생명을 빛나게 하는 우주적 생명체입니다."

"이놈아, 생명체는 애미 애비가 주었지, 어떤 귀신이 준 것이 아니다. 쏴 돌아다니더니 완전히 가버렸구나."

이유구가 당장 그의 부인을 불렀다.

"부인 이놈이 실성해부렀소. 그 많은 가산을 빼돌리고, 수천 냥을 빼돌리더니 이번에는 하인들을 풀어준다고 하오. 하인을 풀어주고 논밭을 나눠주고, 나머지 논은 풀구덩이로 만들 모양이오."

이응서의 어미 나주댁은 현실적이었으나 아들에게는 한없는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방방 뜰 수가 없었다.

"니가 돌아왔으면 며늘아기 데리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야제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부지 배를 지르냐. 아무래도 굿을 해얄랑개비다."

어머니의 해법은 모든 재앙을 물리친다는 굿에 있었다. 이응서는 시천주를 숭상하는 동학에서 말하는 노비, 과부, 백정, 무당, 승려의 해방과, 징세 제도의 개혁, 탐관오리 처벌 등 사회적 개혁에 관한 폐정개혁안을 말해주고 싶었으나 귀신 들린 아들을 구완하기 위하여 굿을 한다고 하니 포기하였다.

"몰래 소를 끌고 가버리고, 쌀도 몇백 석 빼돌려 불고, 암만해도 사람 배래부렀다. 굿이 아니면 너의 병을 고칠 수가 없을 것 같어."

나주댁은 숫제 울상이었다. 하지만 이응서는 하인들, 노비들을 해방시켜야만 진정한 선지식이 된다고 믿었다. 노비는 신분 세습이 엄격했고, 천자수모(賤者隨母)와 일천즉천(一賤則賤) 원칙이 적용되었다. 천자(賤子:천인)는 노비 상호 간의 혼인으로 생긴 소생의 소유권도 비주(婢主:여자 종의 주인)에게 귀속시키고 있었다.

양인 남자와 여자 종이 혼인하는 비가양부(婢嫁良夫)의 경우에도 적용되어, 그 자녀는 어머니의 신분과 같이 노비가 되고, 비주가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지배층들의 지속적인 노비 증식의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노비의 자식들이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양반이나 그 자제가 여종을 건드려서 나온 씨 들인데, 그 아이들도 예외 없이 노비가 되었다. 이것이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자 일천즉천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양인 남성과 천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태종 때 종부법으로 양인이 되었으나, 세종대에 내려와 종모법으로 개정되어 모두 종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군공·납속 등으로 노비 종량(從良:종이나 천민의 신분을 면하고 양인이 되는 일)이 용이해졌다. 노비는 임진왜란 이전 인구의 4할을 차지했고, 삼남은 5할에 이르렀다. 반면 한양은 7-8할이었다. 말하자면 노비가 나라를 지탱하는 자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중 공노비는 입역·봉족·납공으로 구분되어 환갑 때까지 신역(身役:몸으로 치르는 노역)을 부담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 거주하며 가내 노동과 경작을 하던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었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따로 살면서 타 지역 또는 멀리 있는 주인의 땅을 관리하고 곡식과 쌀을 바친 노비다. 이유구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를 두고 있었다.

전라도 순천에 이런 일이 있었다. 종 천복이 나이 사십이 다 되어서야 장가를 갔다. 그는 어느 날 나라의 신역에 동원되었다. 이때 그의 젊은 아내는 만삭이었다.

"여보, 신역으로 나가면 몇십 년 노역을 한다고 하더마는 이러다 우리 살아생전에 보들 못하지 않을까요?"

젊은 아내가 울먹이며 물었다. 천복도 가슴이 미어졌으나 아내를 위로하였다.

"이녘, 걱정 마소.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니 갔다 오는디 한 삼사 년이면 되지 않겄소? 그 사이 아이를 잘 낳아 잘 기르시오."

떠나간 천복은 오 년이 가고, 십 년이 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기도 종이 되어 종살이를 하는데, 열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을 얻어 타계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