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58회)
노비들을 자유인으로 풀어놓는다니까 당장 집안의 노비들부터 반대하고 나섰다. 장성의 백양산록에서 함께 며칠을 보냈던 봉덕과 춘심이가 더 펄쩍 뛰었다.
"큰 주인마님, 작은 마님이 이상한 요승을 만난 이후로 머리가 어째 돌아부렀는가비요. 세상에 없는 생각을 다 하니 잡귀가 든 모양입니다. 이번 참에 단도리를 단단히 해야 할성 부릅니다."
"단도리를 해야 한다면?"
큰 어른 이유기가 물었다.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든지, 팔을 뽑아버리든지, 어디 출입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니께요. 우리를 풀어주면 어디 가서 발붙이고 살겄습니까이."
춘심이도 울상이었다.
"논 몇 마지기 떼준다고 해도 살 수 없어요. 작은 마님 댁 모시고 사는 것이 편한디 어쩌자고 내쫓을라고만 할께라우."
이응서는 노예근성을 생각하였다.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상황에서 현재의 위치에 주저앉아 노비 생활에 만족하는 자들. 속박 받고 산다는 자체를 알지 못하고 수백 년 예속된 생활에 절어 살아온 타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인격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차별과 천시를 수용하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자유인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일인가. 동학이 집강소를 설치하더라도 이들이 깨어나기 전에는 신분 차별 극복이 어렵다는 것을 이응서는 절감하였다.
시아버지 이유기가 며느리 김도향을 보며 물었다.
"며늘아기야, 서방이 탕자(蕩子)로 돌아왔는디, 시방 한술 더 떠서 하인들을 해방시킨다고 하는구나. 봉덕이와 춘심이가 말한 대로 너의 서방이 심히 뇌가 상한 것 같은디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아버님, 소녀는 남편 생각과 같습니다."
"뭣이? 아들 생각과 같다고? 너도 물들었단 말이냐?"
"물든 것이 아니고, 세상의 물리에 눈을 떴습니다. 만덕 스님에게 배웠습니다."
김도향은 남편 몰래 만덕 스님을 찾았다. 남편이 물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스님, 아무 불편 없이 사는디, 왜 남편을 복잡하게 만드세요?"
만덕 스님이 김도향의 위아래를 훑더니 말하였다.
"그대의 남편이 가는 길은 험난하나 바른 길이여. 인본의 길을 가는 것이여."
"인본이라니요?"
"공맹(公孟)이나 불법이 인본일세. 잘라서 말하면 인간의 존엄이여. 공맹은 인의를 중심으로, 사회적 질서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중시하나 근본은 사람다움으로 사는 것이네. 불교는 어린아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 가는 것처럼, 우리 모두 행복을 추구하지만 실상은 허상을 쫓는 불나방들이라고 보기 땀시 세상을 바로 보고 탐진치(貪瞋痴)에서 벗어나 인본의 덕목을 기르라는 것이네. 그란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성리학은 썩었어. 본래의 취지와 달리 신분 질서에 따라 인간을 차별하고, 양반 상놈을 갈라 분열시키니 단결된 힘과 국가적 역동성을 가져올 수가 없지. 그대는 평생 양반 자제의 신분으로 살아왔을 터이니 신분 제도의 맹점을 지적하겠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길게 설명하였다.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특징은 법제상 양인·천인의 엄격한 구분과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의 세분화되었다. 양반은 문무 관직을 독점한 지배 신분으로 세습적 특권을 누렸고, 중인은 역관, 의관(醫官), 율관(律官), 화원, 서리(書吏), 사자관(寫字官:문서를 正書하는 관리)을 담당했고, 상민은 조세·공납 의무를 지는 계층이었다.
칠천(七賤)은 나장(羅將: 의금부·병조 등 병정·형정 관서의 옥졸, 시종), 일수(日守: 지방 관아와 역에서 잡무 담당) 조군(漕軍: 漕運과 선박 보호, 수리 담당), 봉군(烽軍: 봉수대에서 신호·전령 등 담당), 역보(驛保: 역마 사육 및 역무 담당) 등 밑바닥 천역(賤役)을 하는 국가 소속 신분이다.여기에 기생, 혜장, 영인, 향리, 사령, 승려 등 지배층이 언제나 특별한 일당 지급 없이 데려다 쓰는 직업군이 있으며, 신분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었다.<민족문화대백과, 경국대전,대전회통 일부 인용>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