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96주년]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광주전남 항일 인연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화 주역 장석천 등 전남출신 159명 구금 이화여고보 여학생 등 16명 "광주학생 석방" 시위로 체포 옥고 일제하 형무소 보안과 사무실 ‘전시관’으로 개조해 역사 담아내
역사관으로 조성된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서울 서대문 현저동에 들어선 경성감옥의 후신이다. 일제가 경성감옥을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5월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꿨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하 최대의 감옥으로 1945년 해방 때까지 운영됐다. 수많은 의병장, 독립군이 체포 구금됐고, 3·1만세운동의 유관순, 6·10만세운동 권오설 열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사형장에서 순국했던 현장이다.
서대문형무소는 광주·전남지역과도 인연이 깊다.
이곳에 구금된 독립군, 항일투사(사상범) 등은 사진이 부착된 수형카드를 남겼다. 수형카드로 본 수형자는 본적 기준으로 4천484명, 거주지로는 4천409명이다. 이들 중 본적 기준으로 전남(광주 포함)출신은 159명, 거주 기준으로는 85명으로 파악된다. 수형카드를 남긴 수 형자의 3.5%에 해당된다. (박경옥 저서 ‘서대문형무소’참조)
광주전남 출신 항일지사들은 체포 후 재판과정에서 복심법원(2심법원)이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대구감옥에 수감됐다. 하지만 서울,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상당수 지역인사들이 재판 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는 각별하다.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여파로 서울에서도 그 해 말 각급학교에서 격문 살포와 시위가 벌어졌다. 광주 시위 직후 장석천 전남청년연맹 위원장은 11월 17일 긴급 상경해 서울 사회단체와 연대를 결의했다. 장석천과 서울 사회단체는 12월 3일 격문 6종류 2만 장을 경성제대, 각 중등학교에 살포했다.
일제는 경성 한복판에 광주학생시위와 유사한 격문이 살포된데 놀라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나섰다. 당시 서울 시내에 뿌려진 유인물은 자그마치 2만장이었다. 이 정도의 유인물은 상당한 조직력을 갖춘 집단이 전문적으로 인쇄했다는게 일제의 판단이었다.
일제는 전 경찰력을 동원 12월 4일 127명을 검거한데 이어 13곳을 압수수색, 8천매의 격문을 압수했다. 6일에는 장석천 등이 붙잡혔다.
하지만 서울지역 학생들은 12월 9일 제1차 연합 가두시위를 전개한데 이어 15~16일에도 일제 경찰의 비상망을 뚫고 제2차 연합 가두시위를 벌였다. 서울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특히 서울 이화여고보 등 여학생들이 적극 시위에 나섰다. 이들 가운데 16명은 193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주 시위를 서울을 거쳐 전국화한 주역인 전남출신 장석천도 이후 1932년 노동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한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일제 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를 기억·계승하고자 조성한 일종의 박물관이다.
역사관은 일제하 형무소 시설을 최대한 원형보존하면서 건물 내부에 전시시설을 갖추고 있다. 역사관 주요 시설은 서대문형무소 전시관, 옥사, 사형장, 한센병사, 창고 등이다. 전시관은 일제가 서대문형무소 업무를 총괄하던 보안과 청사를 1998년 11월 전시관으로 꾸민 것이다.
전시관은 형무소역사관, 영상실, 민족저항실1~3, 지하조사실 등으로 조성돼 있다. 민족저항실에는 일제하 독립운동의 역사를 시기, 사건 등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주요 사건은 설명패널과 사진이 부착돼 있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