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59회)
천민 개념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지 만덕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칠천(七賤)은 국가에 소속된 천인(賤人) 신분이고, 노비는 개인의 소유물로 취급되었으나 둘 다 지배층과 양반층이 데려다 쓰는 노동 자원인 것은 같네. 이중 노비는 매매가 가능하였고 말이여. 노비 신분은 기생, 혜장(鞋匠:헌 신을 깁는 신기료장수), 백정, 무당, 영인(伶人: 악공과 광대), 사령(使令:심부름꾼) 승려 등일세. 모두 각 처소에 중요한 인간들인디, 한갓 그들의 소모품으로 쓰고 있단 말이시. 이러니 나라의 단합과 응집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 신분인 나도 상놈 취급인디, 깨달은 이상 제도에 침 뱉지 않을 수 없지. 그래서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엄한 벌로 다스리지. 의금부의 고문이 어떤 것인 줄 아는가? 알면 미치고 환장할 것이여."
조선의 죄인 고문 방식은 신장, 곤장, 압슬, 주리, 낙형 등 알려진 것 외에 법적 근거 없이 사적으로 진행된 고문이 더욱 폭력적이고 가혹했다. 혹형(酷刑)이라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악독하게 다루는가를 보여주는데, 죄 없는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려다 보니 허위자백을 받아내는 고문의 강도는 극심했다.
쇠꼬챙이로 죄인의 생식기를 마구 찔러 자백을 강요하고, 그래서 끝내 성불구자로 만들고, 방망이로 무릎 정강이뼈를 바스러지도록 가격하고, 결박하여 거꾸로 매달아 콧구멍에 잿물을 주입하는 비공입회수(鼻孔入灰水) 고문, 족경(足脛)을 거핵기(去核機: 목화씨 뽑아내는 기계)에 넣고 돌리는 고문… 이렇게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고문이 크게 개발되었다.<형전사목(刑典事目), 남형금지사목 일부 인용>
"인간을 벌레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것이 조선왕조여. 온갖 탄압과 위협이 기본 통치술이었어. 백성을 가엽게 여기기는커녕 끽소리 못하도록 밟았네. 그러니 굴종과 승복만이 내면에 체화되어버렸지. 그란디 동학농민군이 들고일어났네. 이런 상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발기한 것이여. 쌍놈의 새끼들이 시험 한번 잘 보거나 줄 하나 잘 탔다고 벼슬아치인디, 묵묵히 일하는 백성을 천인, 상놈, 노비로 구분하여 밟는 것이여. 그러니께 일어나불제. 그대의 남편이 세상 물리에 눈을 뜨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만덕 스님이 따뜻한 시선으로 김도향을 바라보더니 이어갔다.
"무지랭이 상민을 비롯한 칠천과 노비 등 계급이 조선 인구의 칠할 이상이네. 결국 양반 지배층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무한 노동 자원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네. 그러니 생산적이고 개혁적인 창발력이 생길 리 만무하지. 현실에 안주하며 떵떵거리며 살아도 되니께. 보수적일 수밖에 없네. 그런 것들이 지배세력이여. 그러니 나라의 결집력이 붕괴되고 망하는 일만 남았네. 생각해 보시게. 누가 이런 더러운 세상을 축복하며 살겠는가. 나라 전체가 무기력하게 허무주의에 빠져 망국을 자초하는 것 밖에 없제. 시방 일본이나 서방 세계는 과학이다 뭐다 해서 문명이 허벌나게 발달하고 있는디, 조선 반도는 이런 개새끼들이 백성들 잡아가두고 짐승 부리듯 하며 띵까띵까 미주(美酒)에 취해 산다니께. 이들이 또 여성 하대와 멸시를 전세 내놓고 사네. 사회제도 기반이 인구의 반을 천대하고 무시하니 국가적 생산성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
여성 이야기가 나오자 김도향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여성을 하대하고 멸시하니 국가적 생산성을 갉아먹는다고요?"
"그렇다네. 지배 윤리인 성리학은 여성의 활동 공간을 아예 차단하였네. 여성은 단지 종자를 생산하는 종돈(種豚) 신세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잡역꾼에 불과하네. 장자 중심의 상속이 자리 잡은 뒤 재산 상속도 여성에겐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경제권도 상실되고, 과거 응시가 금지되어 관직 진출이 애초부터 차단되었네, 재가(再嫁) 금지가 확대되어 수절이 강요되고, 대신 쓸데없는 열녀 담론과 정절 강조가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네. 조선사회는 이런 비생산적인 도덕 쟁탈전만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 되고 말았네. 위선을 떨며 도덕과 체면을 가리는 것은 지배층의 기호품이고, 무지랭이 백성을 묶는 족쇄여. 지들이 하는 행위가 정작 불상놈 짓인디 우리들더러 상놈이라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