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학관1921시민모임, "흥학관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전략본부로 광주정신 뿌리"
5일 구시청 사거리 옛 터 건물에 사적기 제막…내년엔 학술행사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략본부였던 흥학관의 역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이 있다. 이들은 흥학관의 옛터를 찾아 표지석을 세우고, 옛 사진 아카이브를 검색해 흥학관의 흔적들을 담아낸다. 흥학관에 머물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나서는 답사 활동도 전개한다. 모두들 24시간 흥학관과 함께 숨쉬는 사람들이다.
흥학관은 도대체 어떤 공간이었을까. 왜 평범한 시민들이 나서 자비로 역사의 표식을 기록하려고 할까.
흥학관은 1921년 당시 광주의 부호였던 최명구 가 회갑을 앞두고 거금 1만원을 희사해 건축한 1층 목조건물이었다. 현재의 광주시 남동 ‘구시청 사거리’ 광산동 100번지 일대에 건립됐다. 흥학관 내에는 2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체육관 형 강당을 비롯 사무 공간이 자리했다.
건물과 운동장을 포함해 대략 800여 평에 이르는 제법 큰 건물이었다. 사무공간에는 광주청년회, 노동공제회 광주지회, 전남 노동연맹, 광주신간회, 광주청년학원 등이 간판을 내걸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흥학관에서는 또 송진우, 안재홍, 방정환 등의 초청 강연회가 열렸고, 각종 사회단체 집회는 물론 웅변대회와 음악, 연극이 공연됐다. 밤에는 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야학이 열렸다. 가난한 청년들이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야학에서 공부하는 교육공간이기도 했다.
흥학관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략본부 역할을 수행했다. 또 11월 12일 광주 2차 시위의 기획본부 였다.
그날 오전 광주시내에서 벌어진 한·일 학생들의 우발적인 충돌이 오후들어 조직적인 거리시위로 변한다. 그 거대한 변곡점의 중심에 흥학관이 있었다. 흥학관 사무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장석천 전남청년연맹위원장 등은 긴급회의를 갖고 독서회중앙본부 장재성-각 학교 독서회 핵심 간부를 통해 거리시위로 전환할 것을 지시했다.
이날 시위로 학생들이 검거되자 2차 시위를 기획하는데, 주역들은 흥학관 멤버들이었다. 성진회의 멤버 장재성, 왕재일, 광주시위를 전국으로 견인한 장석천이 모두 흥학관 출신들이다.
흥학관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 흥학관의 부활을 꿈꾸는 이들이 모였다. 이범식 아트 스페이스 흥학관 대표,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나병남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고용호·황행자·손영선 씨 등 전 역사교사 등이 주축이 돼 ‘흥학관1921시민모임’(대표 노성태, 운영위원장 이범식)을 결성했다.
시민모임은 흥학관 바로알기 세미나를 개최한데 이어 흥학관 칸타타(노래극) 공연을 통해 시민들에게 흥학관을 알렸다. 시민모임은 이어 광산동 100번지 옛 흥학관 터에 현판과 내력을 담은 사적기(事跡記)를 돌에 새겨 5일 제막식을 가질 에정이다.
이범식 운영위원장은 "흥학관 건물은 사라졌지만, 흥학관의 항일 청년 정신은 역사속에서 광주정신으로 살아 광주사람들의 영혼 속에 생동한다" 면서 "흥학관의 옛 사진 속 현판을 복원하고, 사적기를 새겨 제막식을 갖고자 한다"고 말했다.
시민모임은 내년 초 ‘흥학관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제로 대규모 학술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