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62회)

2025-11-06     윤태민 기자

 

동학 접주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행정업무 수행과 치안질서를 유지한다. 집강 아래 서기·성찰·집사·동몽 등의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맡게 하고, 각종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응서는 광주와 광산과 담양이 인접한 하남을 지정해 집강소를 설치하려는데 우선 재정 확립이 필요하였다. 재정 문제는 민폐를 끼칠 수 없어 집안에서 쌀을 내놓으려고 하는데 아버지 이유구를 설득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가 너희 놈들이 불한당이 아니고서야 맨 정신으로 관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치 기구를 세워? 나는 그런 것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버님, 이미 전주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전봉준 동도대장이 전라우도를, 총관령 김개남 장군이 전라좌도를, 대접주이자 역시 총관령인 손화중이 고창·영광·함평 일대를 관할하는 집강소를 설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또에게 대든다고? 그렇게 해서 매를 번다고?"

"집강소를 설치하면 민의 인심을 살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자치기구니께요. 백성들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하고, 민과 좋은 정책은 협조하고, 즉 민과 관이 함께 폐정개혁을 추진하게 됩니다."

"농민 자치 기관으로 결성한다고 해도 어림없는 일이다. 군·현청이 폐정개혁에 협조한다고? 주문할 것을 주문해야지, 그것이 통하겠느냐. 관과 대립하면 못 견디는 쪽은 백성들이여. 더군다나 실패할 것이 뻔하고, 그렇게 실패할 적시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느냐."

"뒷감당이라니요"

"집강소가 실패하면 기존의 관이나 유림, 노호 세력이 가만두겠냐? 성공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것은 필시 실패할 것인즉 그 많은 피해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 상상만 하여도 피비린내가 온 산하를 적실 것이다."

봉덕은 이러다 이응서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가 앞으로 나섰다.

"주인마님, 집강소를 세우면 소인이 호위군을 이끌겠습니다. 작은 마님을 지키겠습니다. 걱정 거두십시오. 소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호위 군사를 양성할 것입니다."

"호위군사?"

"네. 그래서 하인들부터 동원할 것입니다. 이들을 훈련시켜 군사로 만들고, 장차 동학농민군과 합류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변혁 운동에는 필히 저항이 따른다. 관의 무력 진압이 얼마나 무서운가. 무기와 화력은 농민군을 앞선다. 그리고 그들은 여차하면 외국 군대를 불러들일 태세다.

김학진 전라감사와 전봉준 동도대장 사이에 집강소 설치를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하부로 내려갈수록 거부하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기왕의 제도에 익숙해져 대단히 배타적이다. 민중은 무지하고, 기득권 세력은 자기들 이익과 결부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거부할 것이다. 탐관오리 척결, 횡포한 부호 징계, 신분 해방, 삼정 개혁, 고리채 무효화, 지주제도 개혁, 방곡령 실시 등 폐정개혁안은 무엇보다 기득권의 중심인 지방 토호나 유림들의 이익을 침범하는 것이다. 이유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인 중에서 힘이 좋다는 노팽식이 앞으로 나서더니 주인마님 이유구를 부축하며 외쳤다.

"주인마님 허락 없이는 너그들 한 발짝도 못 움직일팅게 그리 알어. 난리가 났다, 말로 개판이 되어불구만이. 그럴수록 주인마님을 따르는 것이여."

봉덕이 나섰다.

"니가 뭐간디 작은 마님 나가시는 앞길을 막냐?"

"뭐라고? 쬐깐한 것이 겁대가리 없이 대들어? 이 집은 주인마님 집이고, 작은 마님은 건달 아니냐? 그런 자가 도발해?"

어느새 주인마님 이유구를 따르는 자와 작은 마님 이응서를 따르는 자로 나뉘었다. 두 세력은 마당 가운데서 편이 갈려 여차하면 붙을 태세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