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63회)

2025-11-09     윤태민 기자

 

봉덕이 소리쳤다.

"노팽식, 물러서지 못할까? 시방 세상이 달라졌어. 처처에서 백성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낙들도 들고일어날 참이여. 하인들은 이응서 마님을 따르라."

"성도 없는 놈이 작은 마님 편에 섰다고 우쭐대는구나. 근본 없는 새끼야,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거냐. 당장 물렀거라!"

그러자 하인들이 우르르 노팽식에게 다가들었다. 사뭇 위협적인 태도였다. 그들 역시 성이 없는 자들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근본 없이 자라는 것은 성씨나 본관이 불분명한 부류라는 의미였다. 하층민, 천민, 노비 등 공식적인 신분 기록에서 소외된 계층이다. 조선은 성씨와 본관을 통하여 신분을 구분하는 사회였으니 성씨가 없거나 본관이 불분명한 사람은 ‘근본 없는 놈’으로 당장에 매도되었다. 이들은 어디 난장에 나가서도 말발이 서지 않거나 사람대접받지 못하였다. 고개 쳐들지 못하고 늘 주눅 들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돈을 벌면 족보가 엄격히 관리되지 않는 상황을 이용하여 관리를 구워삶아 성씨를 사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가짜로 성씨를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신분 상승의 증표는 아무래도 성씨가 대신했기 때문에 기왕에 성을 가진다면 왕가의 성인 전주 이씨나 광산 김씨, 안동 권씨, 경주 최씨 따위로 성을 받았다. 사회풍토가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공식적인 사회 활동이나 관직 진출이 어렵고, 사회적 차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돈이 생기면 이 꿈을 실현하려는 풍조가 생겼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대부분 성씨가 없는 하인들이 노팽식에게 위협적으로 대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 또한 잡놈이 아닌지 족보를 캐보자. 어디서 족보를 사가지고 들어온 새끼 아니냐고?"

다른 하인도 노팽식 턱밑에 얼굴을 들이밀고 야료를 부렸다. 다른 자도 대들었다.

"호로새끼, 니가 성이 있다고 하지만 과연 족보가 분명한지 보자니께. 성씨 하나 가지고 우쭐대는 이런 더러운 세상을 고친다면 나도 일어설 것이여."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하인들이 노팽식을 다구리 했다. 노팽식 편에 섰던 하인들이 대들자 양측은 하나같이 피투성이 싸움이 벌어졌다. 곡괭이를 든 놈, 삽을 잡은 놈, 육박전을 벌이는 놈들이 한데 엉겨 싸우는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엊그제만 해도 하나가 되어 주인을 따르던 무리들이 근본 없는 놈이라는 핀잔 하나에 이렇게 폭발하여 난장판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하긴 성씨 없는 설움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판에 자신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야지가 나오자 한순간에 분노를 표출한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감히 어른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었다.

"신분 차별, 노비 철폐를 주장하는 동학당은 옳은 길이여!"

떡이 되어 쓰러진 노팽식을 지켜보던 이유구 주인마님이 세상 변한 것을 절감하면서 소리쳤다.

"당장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모두 벌을 내린다."

그제야 두 패거리들의 동작이 멈췄다. 며느리 김도향도 하인들의 난동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유구가 며느리 김도향에게 물었다.

"며늘아기 이런 난장판을 지켜본 생각은 어떤고?"

"저희가 살림 날 것을 내놓으셔요."

엉뚱한 답이었다. 이유구는 이런 말이 나오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였다.

"나 죽으면 그대로 물려받는 것을 왜 나누자고 하는 것이냐?"

"시아버님, 그것이 아닙니다. 본래 시아버님 재산이니 모든 재산은 아버님이 관리하시고, 우리 몫은 떼주십시오."

"재산을 주면 응서가 모아다 재끼판에 쏟아 넣을 것 아니냐."

"소녀가 관리합니다."

"니가 이렇코롬 변해부렸냐. 그렇게 조신하던 아기가 지아비보다 더하는구나."

김도향은 군자금으로 분할 재산을 쓸 요량이었다.

하인들은 이윽고 남는 자와 떠나는 자로 나뉘었다. 숫자로는 반반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