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64회)

2025-11-10     윤태민 기자

 

저녁에 이르러 떠나는 자들의 행군이 있었다. 어느새 놀이패가 구성되어 앞장서며 요란한 행군 나팔을 불었다. 농악소리가 온 대지로 장엄하게 울려 퍼지니 연도의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였다. 그중 몇몇 젊은이는 대오의 후미에 끼어들어 합류하였다.

이응서는 농악의 장단에 맞춰 걸으면서 부친의 속 깊은 뜻을 가슴 깊이 헤아렸다.

"그동안 나는 너를 오해했느니라. 난봉꾼으로서 세상을 허투루 산다고 생각했는디, 알고 봉게 나라를 새롭게 한다는 농민군에 가담하고, 양곡을 빼돌린 것도 아비가 욕을 당할깨비 재끼판으로 싸돌아댕기며 탕진하는 시늉을 했구나. 그런 아비는 심히 너를 원망하였다. 느자구없는 짓만 한다고 쌔려 죽일 요량만 했다. 그런디 그것이 아니었구나. 가문을 생각하고, 하인들을 생각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께 니가 한량없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몸조심하여라. 다른 누구보다 표적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은게 말이다."

지체 있는 집안의 자제가 동학에 가담했다고 하면 어떤 누구도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귀한 자제라면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유림들은 이미 동학농민군을 비도(匪徒)로 취급한지 오래고, 토호 또한 왕조를 뒤엎는 불한당이라 하여 사병인 민보군까지 결성하여 농민군을 뒤쫓고 있지 아니한가.

이런 때 양반 자제가 하인들을 이끌어 군사를 만들고, 집강소를 만들어 관아와 대립적으로 나가고 있으니 성공 여부를 떠나 불안한 것이다. 그들의 장래에 대해서는 누구도 밝게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유구는 혹, 패가망신의 흉조가 아닌가 하여 노심초사하였다. 하지만 아들의 가는 길이 삿된 길이 아니다. 관습과 타성, 용기가 없어 나서지 않을 뿐, 그의 길은 험난해도 옳은 길이다. 그래서 아무런 계산 없이 양곡을 이백 섬이나 쥐여주었다.

봉덕은 봉덕대로 미천한 신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풍물패를 뒤따르며 각오를 다졌다. 주인집 마당에서 노팽식을 제압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으나 주인마님 집을 지켜야 하는 무리도 있어야 한다고 보고 더 이상 충돌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그를 따르는 30여 하인들을 이끌고 가는 책임감을 느끼고, 두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등산 아래 황룡강 기슭에 자리를 잡으니 광주·광산의 농민군 진지이자 집강소였다. 동학군대장 오권선의 고향이기도 하여서 이응서는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며칠 후 집강소가 열리고, 소식을 듣고 인근 농민들이 집강소를 찾았다.

"억울한 일이 있응게로 참견해 주시오."

이응서는 행정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를 찾았다. 서당에서 글을 읽은 사람은 있었으나 민원을 해결할 담당자가 없었다.

"내가 해볼랍니다. 마름의 어깨너머로 소작료 셈을 하는 것을 보았응께요."

"잘 듣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즉시 처리하라."

봉덕이 민원인들을 맞았다.

"잡세 땀시 미쳐 불겄소. 정 이러면 관리놈이든 아전놈이든 배때지에 칼침을 놓아불고 잡소."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아전놈이 관리와 결탁해서 이중과세를 하는 것이오. 폴새 냈는디 안 냈다고 장부를 내밀면서 또 내라는 것이오. 글을 모른 것을 가지고 억지부링게 미쳐불겄소."

다른 농민은 짓지도 않은 농지세를 부과했다고 하였다. 대개는 지방 수령과 아전이 짜고 행한 짓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있는 비리여서 그것은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이것을 방치할 수가 없었다. 봉덕이 물었다.

"잡세 종류가 어떤 것이오?"

"원래 없던 잡다한 명목의 세금을 추가로 부과하는 것이오. 그런 공금도 유용하고 있다고 합디다."

관리들이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하거나 착복하는 사례 역시 하나의 문화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구조 비리였다. 한데 문제는 이러한 부패를 농민에게 모두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연히 민생 피폐의 원인이 되었다. 그중 악랄한 것이 빅지징세(白地徵稅)와 백골징포(白骨徵布)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