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68회)

2025-11-16     남도일보

그러자 누군가가 아는 체를 했다.

"가짜라고 안 한가. 저 선비는 가짜 증서를 받고 고뇌한 나머지 위선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양심선언을 하신 분이여. 신분과 권한을 증명하는 증서를 찢어부린 분이랑게. 그 정신을 알고도 모르겄어."

죽헌 이윤서는 먼 집안의 이응서가 농민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 길로 해상로를 타고 무안 해제로 들어갔다. 육상은 길이 발달하지 못하여 해제 사람들은 함평만 해상로를 타고 북쪽의 육지를 오르내렸다.

칠산바다를 건너 임치진에 이르자 일군의 농민 군사들이 훈련에 열중이었다. 인근 석산굴(마을) 민대 들에서 훈련을 벌이다가 임치진에 들어와 진을 친 것이었다. 동학 집강소를 설치하면서 임치진을 접수하여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남루해진 두루마기와 귀퉁이가 나간 갓을 쓰고 들어오는 이윤서를 보고 최선현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죽헌 선생, 소문에 과거 급제했다더니 왜 이리 추레한 모습이오?"

난장판에서 뒹굴다 온 사람처럼 초라한 이윤서를 보자 최선현이 먼저 놀라는 것이다.

"청파, 나 물이나 한 그릇 주시오."

그는 떠다 준 물을 들이켠 다음 말했다.

"시방 젊은이들을 호령하는 것이 무엇이오?"

"군사훈련이오. 그보다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것이, 과거 급제했다더니 왜 이런 쓸쓸한 모습이오?"

임치진에서 뱃길로 십 리 정도 노저어 들어가면 만의 끝인 보천굴(동)이 나온다. 바다 양안의 강산 신등 구등 발산 마을을 지나 보천굴에 이르는 것이다. 간척 사업을 하기 전까지는 지도나 임자도에서 뱃길을 타고 강산 발산 신등마을을 지나면 곧바로 보천굴에 닿았다.

이윤서는 보천굴에서 명망 있는 선비로 서당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근동에서는 고매한 인품의 유생으로 널리 알려졌다. 청파 최선현이나 그의 형 민제 최장현과도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의 차이로 내왕이 빈번한 것은 아니었다.

청파 최선현은 동학 접주와 임치진의 집강을 맡아 활약하는 일방, 동학농민군의 고부 봉기 이후 고향에서 군사를 양성하는 중이었다. 그의 형 최장현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여서 현역으로 직접 뛰진 않았지만 관여하였고, 그 아우 최기현이 접주를 보좌하는 접사로 활동하며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석산굴의 최씨 삼형제가 동학농민군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었다.

죽헌 이윤서는 애초에는 이들의 활동을 경계하였다. 왕조 지배체제를 철저하게 떠받들었던 죽헌으로서는 오직 성리학적 예론에 따라 신분질서를 확고히 하고, 왕조가 가는 길을 따르는 것만이 선비의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최선현의 길은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한양에서 매관매직으로 부정하게 받아온 과거 급제 증서를 갖고 내려오면서 민심의 변화를 보았다. 천안-공주-이인-논산-여산-전주-김제-태인-정읍-고창-광주 광산-영광 함평을 거쳐오면서 동학도가 궐기한 가운데 집강소가 설치되고,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고, 노비제도를 철폐하는 집행 과정을 지켜보며 세상의 변화를 읽은 것이다.

죽헌은 그동안 외면했던 청파 최선현의 길이 옳았다고 판단하였다. 최장현·최선현·최기현 형제들 역시 고을에서 넉넉하게 살고 있었지만 동학의 접주가 되고 집강소를 운영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그는 새삼 세상의 변화를 읽었다.

"죽헌 어서 집으로 가보시오. 보천동 고향 마을에서는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고 소를 잡았다고 하오."

이윤서는 이 말을 묵살하고 물었다.

"군사가 모두 몇 명이오?"

갑자기 왜 묻는지, 최선현이 경계의 눈초리로 이윤서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새 불신의 모습이 역력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