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2장] 집강소-민본의 시대(269회)
군사가 몇 명이냐고 묻는 것은 군사 기밀을 알아내겠다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봉대산의 봉수대 연락을 통하여 임자도와 지도, 낙월도 쪽에서 젊은 장정들이 들어온다는 봉화가 전달되었으니 지금 숫자가 얼마가 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죽헌은 군사 숫자를 묻는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내가 왜 군사 숫자를 묻는지를 말하겠소. 나는 동네 앞 바다를 간척하여서 천석군이 되었소. 그중 남는 쌀이나마 군량으로 쓰도록 지원하기 위해서요."
최선현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주민들이 무언가를 지원하고 싶어도 두려워서 못하고 있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헌, 내가 오해하였소. 죽헌이야말로 후학을 기르는 지식인층이고, 그래서 동학에 관하여 적대시하지 않나 하는 오해를 했던 것이오. 또 우호적이라고 해도 관아에서 탄압하고, 동학배를 잡아들이는 판국에 죽헌이 우리 편에 서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소. 유생일수록 동학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서 죽헌을 벗으로서 생각을 하다가도 한계가 있다고 하여 불신의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오. 요즘 부자지간에도 생각이 달라서 밀고하는 일이 생기니 벗이라 해도 조금은 경계하게 된단 말이오. 이해하시오."
죽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러리라고 생각하였다. 한양에서 내려오는 과정에서도 지켜보았다. 같은 동도(東徒)라고 해도 노선 싸움이 치열하였다. 세상 잡사 잊고 신앙 위주로 가자는 쪽과 부조리를 타파해야 한다고 행동주의를 내세우는 쪽 간의 노선 투쟁이 치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호남 지방은 달랐다. 동학군이 집강소를 설치해 직접 세금을 걷고, 부패 관료를 처벌하는 등 실질적 자치 행정을 펼쳤다. 그러자 일부 양반층도 서서히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거기에는 관료들의 횡포와 착취도 한몫했다. 곡창지대라는 이유로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심하였고, 양반층이라고 해도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받는다는 것뿐, 이리 뜯기고 저리 빨리는 상황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호남 지방의 기득권층도 이러다가는 나라 망하겠다는 기존 질서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때, 동학이 들불처럼 번져 평등 이념과 남녀 차별, 신분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각 고을의 지휘자는 서당에서 글을 배웠거나 깨우친 사람이 주를 이루었다. 개혁과 신분 해방의 요구가 깨어난 지식인층에 의해 불이 붙으면서 상민, 천민들에게 전파된 것이다.
"군량을 보태겠다는 말씀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오. 하지만 관아가 두렵지 않소이까."
최선현이 물었다.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변화의 물결을 보았소. 도도한 흐름이었소이다. 그래서 그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저항운동이 꺼져버릴까, 그것이 두려웠소."
"하긴 집강소를 생각하니 심히 우려되고만이오. 집강소를 설치하였으나 찾는 사람이 없으니께요."
"왜 없소이까."
"양반층도 관아의 눈치를 보는디, 하층민이 눈치를 보지 않겠소? 많은 피해의식으로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잘못 기웃거렸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고 생각하겠지요."
"충분히 그럴 것 같소. 집강소가 관아에 의해 강제 제압되면 거기 참여한 우호적인 백성들만 골로 간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해하오."
집강소는 전주에 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하고 전라도와 충청도 오십여 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했지만, 행정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집강소는 사실상 없었다. 간판을 걸어놓았을 뿐, 행정업무는 휴무 상태였다. 이중의 행정 기관에 백성들이 더 혼란을 겪는 양상이었다.
봉대산의 봉수대(烽燧臺)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섯 개의 봉수대 굴뚝에서 일제히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 것이다. 난리가 났거나 적이 침략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다. 봉수대의 신호 방법은 낮에는 연기의 개수, 밤에는 불의 횟수로 위급 상황을 전달하는데, 적이 접근하면 2개, 접경에 가까워지면 3개, 침범하면 4개, 접전 시에는 5개의 연기가 올랐다. 한참동안 대처가 미흡했던지 봉수군이 직접 하산하여 외쳤다.
"장군, 왜군이 경복궁을 침탈하였고, 왕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도소로 이동하라는 명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