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3장] 갑오왜란(275회)
민비 정권이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려고 청나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한 것은 엉뚱한 방향으로 사태를 몰아가고 있었다. 그중 잘 훈련된 일본군의 위세는 청군을 압도했고, 러시아 공사관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간파한 사대부는 없었다.
경복궁에 주둔한 조선군 병력이 기백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첩보에 따라 오시마 혼성여단장은 혼성여단 8000명 중 1000명씩 동서 쪽에 분산 투입했다. 그는 경복궁 서쪽의 영추문과 동쪽의 건춘문에서 일본군이 동시에 공격해 조선군 경비병을 혼비백산시킨 뒤 궁을 점령하도록 명하고, 왕이 묵고 있는 향원정 앞 함화당에서 합류해 무력 과시를 하는 작전을 짰다.
광화문을 공격하지 않고 양측방 수문(守門)에서 공격하는 것은 정방향의 남쪽 광화문 병사들이 상대적으로 잘 조련된 장위영의 경비 초병(哨兵)들로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무라의 첩보는 언제나 정확하였다. 광화문에서 근정전, 교태전을 거쳐 함화당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도 있을 뿐 아니라, 광화문 싸움이 요란하게 벌어져 시끄러워지면 그 틈새를 이용해 왕이 어디론가 도망칠 것이다. 그러면 독 안에 든 쥐를 놓치는 꼴이 된다.
일본군은 한양 외곽에도 부대 배치를 완료했다.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장위영 군사를 옥죄기 위해 일본군 21연대가 후방에 배치되었고, 흥인지문(동대문)을 지키고 있는 홍위영에는 일본군 11연대가 담당하고, 한양 외곽과 북한산성을 지키고 있는 장용영 뒤편에 일본군 12연대를 배치했다.
목멱산(남산)과 북악산에 척후 부대와 감찰병 부대를 배치해 서울의 동향을 살펴 각 부대와 교신했다. 즉 목멱산 부대는 경복궁 정문의 광화문, 동쪽의 흥인지문, 남쪽의 숭례문을 감시했고, 북악산에서는 동쪽의 숙정문, 서쪽의 창의문, 돈의문을 감시하였다. 이중삼중의 감시조와 침략조가 배치되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으로부터 조정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동상이몽이었다.
스즈키 대대장이 병력을 향해 명했다.
"오시마 혼성여단장의 명령이다. 조선군 쪽으로 가서 총을 쏘아라."
"네?"
기무라 중대장이 의아해서 물었다.
"시킨 대로 해! 너희들은 조선군 병사 쪽으로 숨어 들어가서 우리를 향해 총을 쏘란 말이다."
"네?"
기무라 중대장이 역시 의아하여 되물었다.
"빠가! 시킨 대로 하란 말이다!"
기무라 중대장이 일군의 병사들을 선발하여 방어 수비 중인 조선군 쪽으로 다가가 으슥한 골목에서 일제히 일본군이 포진한 진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스즈키 대대장은 벌써 일본군을 모두 은폐물에 잠복시켰다. 빵빵빵빵, 연거푸 총을 쏘았으나 다친 일본군은 없었다
이 총소리를 듣고 다른 조선군 지휘관이 휘하 부대를 향해 소리쳤다.
"쏘는 자 누구냐?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움직이지 마라!"
전속 부관이 지휘관을 향해 보고했다.
"아마도 강화도에서 온 지원군인 것 같습니다. 왜군의 준동을 못 참는 지휘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서 말하라. 적의 동태를 살핀 다음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라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부관이 총 쏘는 쪽으로 말을 달리자 총을 쏜 자들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부관은 다행이다 여기고 생각 없이 돌아왔다. 이때 일본군이 벌떼같이 일어나 조선 수비군을 향해 총을 쏘았다. 자기들을 향해 총을 쏜 대응인 것이다. 조선군의 피해가 막대했다.
다음날 주한 일본 공사 오도리 게이스케가 조선 왕실을 찾았다.
"병조(兵曹)대감, 어찌 이럴 수가 있으무니까?"
군사 편제가 복잡하여 어느 기관을 잡아야 의사가 전달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어전에 나아가 병조판서에게 들이댔다. 일본군이 기습을 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이댄 것인데, 이를 빌미로 보복 대응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조정은 일본군의 위장 전술을 알지 못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