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국내 유력한 신문에 실린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칼럼을 읽었다. 그는 퓰리처상을 세 번씩이나 받은 명사다. 그는 아일랜드의 성공적 발전을 그 예로 들면서 오늘의 세계에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 앵글로 색슨의 모델을 권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일랜드가 오늘 비약적 성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의 사회의식 모델이 아니고 독일의 관념적 모델이 아닌 실용적인 앵글로 색슨의 모델을 그 방법론으로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몰인정한 놀부’들인 앵글로 색슨을 따라야 산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나 독일의 미래가 박물관으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아일랜드처럼 성장할 것인가는 그들이 앵글로 색슨의 모델을 따를 것인가 여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앵글로 색슨의 냉엄한 현실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 자유주의적 인식과 무한 경쟁의 수용을 의미한다. 아일랜드는 오늘 1인당 연간 소득이 4 만불로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독일을 능가한다. 아일랜드가 지난 2003년 미국에서 도입한 외자 유치는 중국을 능가한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미래는 더욱 기대된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3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나라다. 16세기에는 크롬웰이 이끄는 군대가 그들의 인구 30만을 학살한 적도 있었다. 30만은 당시 인구의 절반이었다. 그들의 영국 및 영국인에 대한 원망은 골수에 사무쳐 있을 것이다. 앵글로 색슨하고는 민족이 다른 그들은 켈트족이고 종교도 영국인들과 달리 대개 가톨릭이다. 그들은 앵글로 색슨과는 달리 인심도 후하다. 맥주집에서 그들은 자기가 술값을 낼 줄 안다. 한국인과 비슷하다. 그들이 앵글로 색슨의 모델을 따랐다니 독심을 먹은 모양이다.
나의 아일랜드 여행때 버스 안은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 영국에서 일하고 휴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일랜드 사람들이었다. 명절에 우리가 그렇듯 선물꾸러미를 들고 가는 가난한 사람들, 그 때 아일랜드는 가난한 나라였다. 가난한 버스 안에서 피곤하고, 나는 잠을 청할 수 도 없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그들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시골길을 달리는 야간 버스의 창 밖 풍경을 상상 속에서만 그려 보면서 내일이면 W. B 에이츠의 명작의 고향을 간다 싶으니 흥분되었다.
새벽 2시경에 홀리해드라는 항구에서 내렸다. 그 때만해도 동양 사람은 나 밖에 없는 낯선 곳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여권 검색을 받고 페리로 갈아타고 한참 만에 상륙한다 싶더니, 밤중이라 더욱 말이 없는 일행을 따라, 다시 결코 짧지 않은 어두운 길을 걸어야 했고 그리고 다시 또다른 버스를 타고 아침 7시경에야 더블린의 어딘가에 짐짝같이 내렸다. 그리고 길가에서 사든 빵 한쪽과 콜라 한 병에 의지한채 기차역을 물어 찾아가 대합실에 앉았다. 수도 더블린 기차역 대합실은 조용하고 가난하였다. 수도 역이 가난하다는 느낌에서 나는 한없이 아일랜드가 좋았다.
슬라이고로 가는 기차는 8시에 출발한다니 1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에 편한 시간을 얻는다 싶어 기차를 기다리면서 잠깐 의자에서 졸았다. 한참 편안함 속에서 누군가가 흔든다 느끼고 눈을 떴더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코를 골았던 모양이다. 이상하게 생긴 놈이 아침에 코를 골고 있었으니 가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눈은 애정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행선지를 묻기에, 내가 한국에서 온 여행객으로 W. B. 에이츠의 묘지를 찾아간다고 말했더니, 감동한 듯 자기는 초등학교 교사인데 사실은 거길 아직 가보지 못 했다고 말하였다. 거만한 영국인과는 다른 순박과 인정이 거기 있었다. 그들이 앵글로 색슨의 모델로 부자가 되었다니 나는 마음속에 실락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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