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지세 이용 요충지에 자리잡은 고구려 대형 산성
고이산 동·서 주봉 사이에 구축…주성·외성 등으로 구성
방어구조 탁월…동문 밖 고구려 후기 벽화무덤군 발굴
성 안에선 생활·생산용구·무기·건축자재·동전 등 나오기도
신성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고고학 조사와 발굴을 거쳐 자료가 완벽하기로 몇 안 되는 고구려 대형 산성 중 하나이다. 1940년과 1944년에 ‘만일(滿日)문화협회’(일제강점기 세운 단체)의 이름으로, 무순 고이산산성의 건물터와 성문터 등을 비롯해 주변 사적지들을 대규모로 조사한 바 있다.
일본중앙공론미술출판사는 뒤늦게 1983년에 이 조사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북관산성’이란 책을 출판했다. 요녕성과 무순시의 문화재 직원들은 1950년대부터 고이산산성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과 발굴조사를 거쳐 대량의 고고학자료를 수집했다. 신성은 요동 고구려 옛 성 중 고고학 발굴과 조사가 가장 잘 되어 학술계의 논쟁이 가장 적다.
고이산의 동·서 두 주봉 사이에 자리한 신성은 대체적으로 주성(主城)과 외성(부성<附城>이라고도 부른다)으로 구성되었다. 신성의 서북쪽에 있는 최고봉은 해발 230m 되는 장군봉(將軍峰)이다. 1905년 러·일 전쟁 때 여기서 전사(戰死)한 러시아의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전하는 이 산봉우리와 이어진 작은 산등성이가 남동쪽으로 뻗어 나와 성 안에 깊숙하고 넓은 동·서 2개 골짜기를 형성했다. 신성의 주성은 그 동쪽 골짜기를 둘러쌓았고, 외성은 서쪽 골짜기와 그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차지하고 있다.
주성은 성 안의 남북으로 된 골짜기를 따라 나있는 신작로가 세로로 지르고 있다. 이 신작로가 지나는 골짜기의 남북 두 입구가 산성의 남문과 북문 터다. 이 신작로는 주성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동쪽 부분은 동성(東城)이고 서쪽 부분은 서성(西城)이다. 동성과 서성으로 이루어진 주성은 동·서·북 3면의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따라 둘러쌓았는데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불규칙적인 다각형으로 된 주성은 동서 길이가 약 1.2㎞이고 남북으로는 0.9㎞이며, 둘레의 길이는 4㎞ 남짓하다. 주성에는 남문, 북문, 동문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 남문은 산성의 정문으로서 그 몇 백m 앞에는 심양에서 길림과 통화로 가는 국도와 철도가 가로 나있다. 남문터 길 서쪽에는 ‘요녕성중점문화재보호단위 고이산산성’이라 새긴 낡은 돌비석이 칼로 깎은 듯한 한 토막의 토축 성벽 단면 옆에 세워져 있다. 옹성구조로 되어 있는 북문은 예부터 북쪽으로 철령의 청룡산산성과 최진보산성 및 옛 부여성인 성자산산성을 잇는 교통요로를 지키고 있다. 북문 양측으로 약 5m 높이의 성벽 터가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문터에도 남문터의 비석과 똑같은 내용으로 조각한 비석이 한편에 서 있다. 역시 옹성구조로 되어 있는 동문터 밖으로 북쪽에서 흘러오는 무서하(撫西河)와 그 양안의 건물들이 내려다보인다. 동문터 남쪽으로는 5m 높이의 성벽 단면이 풀숲에 가려져 있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1950년대만 해도 이곳에서는 대형 가공석으로 된 성문 주춧돌과 돌계단을 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장군봉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산등성이가 남쪽으로 뻗어가다가 점차 동쪽으로 굽어져 주성 남문 앞 200m 지점에 가로놓인 산머리와 만나 커다란 옹성을 이루고 있다. 이 부분이 신성의 외성이다. 면적은 주성과 거의 맞먹는다. 외성은 또 서북구역과 동남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그중에서 말할만한 것은 동남구역이다. 이 구역은 주성 남문 앞의 산머리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서쪽으로 약 500m 가서 산등성이를 타고 동북 방향으로 내려와 신성의 서쪽 골짜기를 넘어 주성의 서벽과 이어지는 성벽이 비스듬하게 동서로 대칭되는 집게 모양으로, 주성의 남문을 둘러친 옹성을 이루고 있다. 고이산 요탑이 바로 이 옹성 남쪽의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산성 남문터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보면 우거진 숲 사이로 이 탑의 꼭대기가 보인다. 이 외성은 주성을 축조한 후 당나라군이 쳐들어 올 때 보수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외성을 축조한 것은 산성으로 올라오고 있는 적들을 1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주성 서쪽과 남쪽에 커다란 고리모양으로 된 이 외성 성벽은 주성 양쪽으로 겹성을 이루고 있어 신성의 방어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고구려의 다른 산성보다 유별난 것은 신성의 주성 밖에 설치해 놓은 2개 부속 건축물이다. 하나는 주성 북벽 중간에 성 밖으로 쌓아놓은 사람의 혀 모양으로 내민 작은 성이다. 길이 140m, 너비 50m 되는 이곳에도 옛날에 성벽이 둘러쳐져 주성과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벽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소나무만 가득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서쪽과 북쪽을 바라보면 산성 서북쪽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의 전경, 성 북쪽의 평지와 마을, 먼 산들이 역력하다.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동그란 작은 석벽이 ‘8’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주성 동남쪽 모서리 산등성 위에 쌓아놓은 이 작은 성은 이미 허물어져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부속 건축물은 모두 고구려군이 성 바깥을 살펴보는 보루(堡壘)로서 산성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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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성벽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산등성이 위에 두텁고도 높게 흙을 쌓고 간혹 돌멩이를 섞어 쌓은 것이다. 이는 동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구간에 잘 보존되어 있는데, 남아있는 높이가 8m나 된다. 둘째는 산등성이 안에 큰 돌로 단층 석벽을 쌓은 다음 석벽과 산등성이 사이에 흙을 넣어 다진 것이다. 주성의 동서 성벽 사이에 쌓은 남벽이 바로 그러하다. 세 번째는 평지에 먼저 돌로 약 30~50㎝ 높이로 성벽의 기초를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다져 놓은 것이다. 동쪽 성벽 문터의 두 단락이 그러한데,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5m다.산성 안에서는 일찍이 많은 건물터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터는 주성의 서쪽 성벽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산성 동문 밖에서는 고구려 후기의 벽화무덤군이 발굴되기도 했다. 성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로는 대량의 생활과 생산용구, 무기 및 건축자재들과 동전 등이다. 그중 동문 안에서는 철촉, 철갑 조각, 철투구, 칼, 창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고구려의 붉은 줄무늬기와조각, 연꽃무늬 막새기와와 회색 토기 파편 등이 대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요, 금 및 청나라 시기의 유물들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서쪽 성벽터 부근에는 고구려 시기의 오랜 돌절구가 나뒹굴고 있으며, 현재 살림집이 있는 밭에서는 지금도 당시의 기와조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주성 서쪽 성벽에서 남문으로 내려오는 길목 어름에는 고구려 시기의 옛 우물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메워졌고 대신 그 우물터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을 받아내는 비닐관이 작은 도랑과 이어져 있었다. 옛 우물은 남문 바깥 외성 안의 북관마을에도 하나 있었는데 오래 전 우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입구에 큰 중국식 가마를 덮어놓았다. 이곳에서 20여 년을 살았다는 사경당(謝慶堂)이라는 노인이 이를 증언했다. 현지 학자들 가운데 신성과 무순 옛 성을 합쳐서 고이산산성이라 불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옛 신성이 전란으로 사라진 후 명나라 홍무 17년(서기 1384년)에 명 태조는 고이산 아래 남쪽으로 0.5㎞ 떨어진 곳(지금 무순 시가지)에 석성을 쌓고 그 이름을 무순성이라 지었다. 오늘의 지명 무순이 여기서 유래했다. 그 당시 무순성의 둘레 길이는 2리(里)인데, 성 밖으로 너비가 2장(丈), 깊이가 1장 되는 해자를 파놓았다. 그 후 세상의 변천에 따라 무순성은 훼손과 중수의 과정을 거듭하다가 1950년대에 허물어버렸다.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녕조선문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