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농업 선구자 -23. 나주 이영길씨>

23. ‘한라봉’ 나주 이영길씨

나주서 제주보다 앞서 국내 첫 시험재배

빈곤의 악순환 차단 위해 우수 품질 도입

기술보급에 매진…지역 농민 살 길 마련
 

전남 나주 이영길(76)씨는 우리나라 최초로 ‘한라봉’시험재배를 시작했다. /전남도 제공

겨울철 대표 과일인 ‘한라봉’은 제주의 특산물로 잘 알려져 있다. 명산 한라산의 이름을 딴 데다 제주도의 생산량이 가장 많은 탓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한라봉을 처음으로 재배한 지역은 바로 ‘전남 나주’다.

지난 1987년 불모지나 다름없던 나주에서 이영길(76)씨가 일본에서 도입해 최초로 시험재배에 이어 95년부터 시설재배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됐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작물재배 한계선이 북상하면서 한라봉 재배에 적합한 아열대성 기온조건이 형성됐고, ‘사질양토’의 비옥한 토질에다 과실의 당도를 결정하는 연중 일조량이 제주지역보다 연평균 400~600시간이 많아 고품질 한라봉의 생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본서 종자 구해=이 씨는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청년이었다. 그러던 그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 하나 때문에 농군이 됐다. 그는 “농촌 사람들은 왜 코피 터지게 일해도 잘 살 수 없지?”라는 의문. 그래서 그는 “농촌에서, 다른 농군들과 함께 잘 먹고 살자”고 결심했다.

70년대 석유, 철광 등 자원 파동으로 한참 농촌이 힘들 무렵 이씨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전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해 교사 자격증까지 있던 그였지만 평안한 삶은 포기했다. 70년대 중반 농촌은 고리채 등으로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고생만 하고 대우를 못 받는 농민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같이 잘 살기 위해 소득을 높일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농민의 길로 이끈 것이다. 농사 문외한이던 이씨는 우연히 어떤 책을 통해 ‘멜론’을 만났다. 지인을 통해 일본에서 종자를 구해 시험재배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첫 멜론재배였다. 이후 인근 비닐하우스 농가에 멜론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1985년에는 나주 전 지역에서 재배됐다. 1987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라봉 시험재배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종자였지만 일본 사람들이 역으로 사갈 정도로 우수한 품질의 멜론과 한라봉을 생산했다. 그는 “나 뿐만 아니라 나주지역 재배 농가들의 소득도 함께 올라가 기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영길씨가 농사기술을 배우기 위해 읽었던 국내외 서적과 잡지들 모습. /전남도 제공

■이웃농가에 재배기술 전수 ‘큰 보람’=그는 지금까지 380종의 멜론과 19종의 한라봉을 시험재배하는 선진 농업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 독일산 라임 등 익숙하지 않지만 경쟁력 있는 다양한 농산물들을 시험 재배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농업을 모르던 이씨가 다른 농업인들보다 늘 몇 발짝 앞서 갈 수 있었던 것은 배움에 대한 열정 덕분이었다. 일본어·영어·독일어 등을 직접 터득해 일본 3대 농업 잡지 등을 탐독하며 지식을 쌓았다.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새로운 것이 보이면 도전했다.

여기에 이씨는 한평생 자신이 배우고 터득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농군이다. 그가 희망하는 가치인 농촌에서 ‘더불어 잘 살기’를 실천하고 싶어서다.

1990년대부터 멜론재배 기술보급 교육강사로 참여했고, 한라봉의 경우 그의 선진적인 농업기술은 2002년부터 나주시 9개 읍·면·동 50여명으로 조직된 나주 한라봉협의회의 농가를 대상으로 매월 22일 농가에 전수되고 있다. 그의 성공 농업을 배우기 위해 제주도 한라봉 재배농가들도 견학온다.

그의 기술전수는 전남대, 순천대 등 대학 강단에서도 수년간 강의가 지속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누군가는 그에게 “이득도 없이 기술을 전수하느냐”고 묻지만 그는 자신이 바라고 꿈꾸었던 삶을 지속하는 것일 뿐, 다른 마음이 없다.

한평생 공부하고, 묘목을 키우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많이 힘들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형님 덕분에 기술 잘 배워서 잘 살게 됐다. 고맙다’는 이웃농가의 말 한마디면 고생했던 것이 KGS 순간에 잊혀진다”고 말했다. 이어 “내 노력으로 농촌이 잘 살 수만 있다면 더 기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무엇보다 그의 꿈은 여전히 농업경쟁력 확보다.

미래에는 식량이 무기가 될 것이다. ‘빵’이 ‘핵’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그래서 농촌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연구를 통해 더 좋은 품종을 만들어 경쟁력을 가져야 농업도 살고 나라가 산다는 게 그의 한결같은 소신이다.
 

전남 나주시 노안면 도산리 시설하우스에서 김철동씨와 가족들이 한라봉을 수확하고 있다. /남도일보DB

■제주 한라봉 아성에 도전=이런 가운데 제주의 특산물로 잘 알려진 한라봉에 대한 남도(南道)의 도전이 거세다.

지난해 기준 나주지역 한라봉 재배면적은 21만㎡에 이른다. 50여 농가가 참여해 연간 400여t을 생산한다. 생산량은 제주도의 1%에 불과하지만, ‘한라봉 첫 재배지’라는 농가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히 농가들도 일정 이상의 당도와 크기를 갖춘 과일만을 출하하는 등 타 지역 한라봉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나주시가 시설 현대화와 친환경 재배 등 한라봉 육성에 적극 나서 경쟁력을 더하고 있다.

황금색 ‘나주 한라봉’은 새콤달콤한 맛과 높은 당도가 일품으로, 무농약·친환경농법으로 재배돼 안전성 면에서도 뛰어난 겨울철 대표과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당도뿐만 아니라 비타민C 함유율도 높아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주고 추위를 이기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항산화물질인 카로티노이드 성분이 풍부하며, 카로틴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눈 건강에도 좋다.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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