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고개와 이십곡리에 숨겨진 뜻

잣고개와 이십곡리에 숨겨진 뜻

<김성식 조선이공대학교 교수>
 

무등산장길을 운전하며 지나갈 때마다 대학시절 은사님이 생각난다. 두시언해를 강의하시던 어느 날, 중국 최고의 시인이자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가 제갈량의 사당에 참배하러 갔다 제갈량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한시‘촉상(蜀相)’의 두련(頭聯)을 읽어나가시다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무등산장 가는 길에 잣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 이름을 잣고개라 부르는 이유를 묻는 질문이었다. 광주 출신이 절반이나 되는데도 대답하는 학생이 없자 중세 우리 말 고어(古語) ‘자’라는 말은 한자 ‘성(城)’의 뜻으로 그곳은 옛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무진고성(武珍古城) 터라고 말씀하시며 은사님께서 문화재위원으로 계실 때 ‘잣고개’라는 지명 하나로 발굴을 시작하여 성터임이 확인되었다고 하셨다.

사실 이전까지 많은 시민들은 잣나무가 많아 잣고개로 불렸거나 까치가 많다고 하여 작고개(鵲峙)라 전해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1988~1989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신라 하대에 처음 성을 쌓고 부분적으로 다시 고쳐 고려시대까지 사용하였다는 것이 밝혀져 1989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의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지명에 대한 관심이 결국 성터를 발굴하게 된 셈으로 평소에 그냥 부르는 지명일지라도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998년 화순군 용역을 받아 13개 읍면의 민속을 조사하던 중 화순읍 이십곡리를 찾게 되었다. 행정구역명으로 이십곡리여서 스무 개의 계곡이 있는 마을인 줄 알았다. 조사 당시만 하더라도 큰 도로에서 약 2㎞ 쯤 들어가야 있는 마을로 지장산과 수래바위산, 평풍산으로 둘러싸인 구릉 지역에 위치해 있어 밖에서는 전혀 마을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정월 보름 당산제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마을 사랑방에서 어르신들과 당산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한 분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책이 있다며 가지고 오셨다. 한지에 붓글씨로 써내려간 책으로 표지에 <隱谷誌(은곡지)>라 쓰여 있었다. 그 책자를 읽어 내려가다 드디어 마을 지명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골짜기가 구부러져 마을이 외부에서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어 ‘숨은실(隱谷)’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며, 고려조의 고관 최참판이 나라가 망하자 피난적지를 찾던 중 이곳에 와보고 외부와 차단이 되고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지역이라 은거하면서 ‘은곡(隱谷)’이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할 정도로 타지 사람들이 잘 알 수 없는 숨은 동네라는 것이다.

이런 ‘숨은실’이 다시 ‘스무실’로 불리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 때 음차(音借)하여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십곡리’로 기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구전에 의하면 마을 주변에 스무 개의 작은 고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주민들과 하나하나 위치를 확인하며 세어보았더니, 바백이골(바위가 있는 골), 범박골, 재경골, 명장골, 뒷궁골, 부찬등골, 동박골, 납닥골, 수리박골, 정골, 성적골, 몰밭골, 풋당골, 큰재골, 웃골, 세름골, 참새골, 노적박골, 불당골, 비암골 등 크고 작은 스무 개의 고개가 있어 이십곡리란 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신너릿재터널’이 개통되면서 이제 ‘이십곡리’는 외부에 노출되어 더 이상 숨어 있는 마을이란 뜻의 ‘숨은실’은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숨은실’이 주는 토속적인 지명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십곡리 바로 위에 있는 너릿재 또한 옛문헌인 <동국여지지>에는 고갯마루가 널찍해 ‘평평하다’는 뜻의 ‘광현(廣峴)’으로 표기되었으나, 이를 한자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판치(板峙)’가 되었다거나, 조선조 말 그곳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을 대규모로 처형해 그 시신들을 담은 관들이 길게 놓여 있었다 하여 ‘널재’로 불리게 되었다는 말처럼 지명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함께 늘 변화되고 있다. 하여 현재 부르고 있는 지명만으로 그 고장을 이해하려 해서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잣고개’가 원래 ‘성터’였다는 것과 이십곡리가 본래는‘숨은실’이었고, 고갯마루가 널찍해 ‘너릿재’였다는 것처럼 그 유래가 제대로 고증될 때 주변이 우리들에게 훨씬 가깝게 다가설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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