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정용식 상무의 남도 섬 이야기-완도 보길도
찬 바람속에서도 역사와 문화, 풍광이 빛나는 섬…완도 보길도
조선시대 3대 정원으로 꼽히는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
아름다운 바다·갯돌해변 파도소리가 조화 이루는 곳
막혔던 가슴도 뚫어 주고 어머니 품같이 평안한 섬으로…

예송리 갯돌 해변 문화유산으로서, 전남 완도 보길도는 관광지로, 문화유산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보길도는 소안도 가는 완도 화흥포항과 해남 땅끝 갈두항에서 노화도 가는 배편을 이용하면 된다.

문화유산으로서, 관광지로서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섬 전남 완도 ‘보길도’. 조선시대 3대 정원중 하나라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부용동 원림 때문이리라. 고산의 은둔지이며 왕국이자 별장이다.

보길도는 소안도 가는 완도 화흥포항과 해남 땅끝 갈두항에서 노화도 가는 배편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갈두항이다. 땅끝 전망대에 오르니 크고 작은 섬들이 남해바다를 가로막고 있다. 날씨가 흐려 멀리 추자도까진 찾기 힘들지만 자잘한 섬들 너머로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가 잡힐 듯 들어온다.
 

정용식 남도일보 상무

우리나라 전복 50%를 생산하는 노화도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저 보길도 가는 길목 역할이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엄청난 부(富)를 지닌 대감이 많은 노비들과 보길도에 터 잡고 있을 때 그 앞 노화도의 어민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두 섬이 한때는 척(刺)을 지고 살았다는 설(說)도 있다. 30여분 섬들 사이를 달려 신양진항에 도착하여 노화도 중심을 가로질러 끝자락 보길도대교가 보이는 곳, 이목항이다. 일행이 촘촘이 앉아야 하는 조그만 식당(‘아구랑 탕이랑’)에 들어섰다. ‘전복의 섬’에서 전복 먹기엔 회비사정이 허락지 않아 찾은 곳이기에 기대하지 않았는데 맛과 가성비는 최고다. 주인장의 친절과 후덕한 인심은 덤이었다.

바람이 매섭다. 예고된 추위 때문인지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커다란 배를, 관광지 보길도를 우리가 전세 낸 듯하다.

#역사속에서 만나는 윤선도와 송시열

고산선생은 병자호란으로 은둔 생활하고자 제주로 가는 길에 태풍을 피해 보길도를 만나게 된다.‘연꽃을 닮은 산세’에 매료되어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하고 숨을 거둘 때까지 지냈다. 34년기간 동안에 일곱 번을 드나들며 13년을 머물면서 세연정, 낙서제, 동천석실등 건물 25동을 짓고 걸작 연시조 ‘어부사시사’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보길도에서 얻은 셋째부인, 자식들과 은둔 공간에서 전원생활을 즐겼다.

바른말하기 좋아하고 올곧았지만 칠순이 넘어서까지 중앙 권력투쟁에 개입한 윤선도의 운명은 기구하다. 71세에 10여년의 귀양생활 후 81세에야 다시 돌아와 85세에 보길도에 생을 마감했다. 이난용 보길면 총무팀장은 매서운 바람속에서도 윤선도와 문화유적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토해낸다. 아름다운 곳이다. 겨울이라 삭막한 기운은 감돌고 동백섬의 명성에 걸맞게 지천에 동백나무들이 깔려있지만 아직 그 화려함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오랜기간 조성 했을 세연정은 그 자태가 웅장하다. 500여년된 금강송이 버티고 육중함이 느껴지는 누정(樓亭)과 각양각색의 바윗돌이 잘 배치된 연못은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질펀하게 술에 취해 ‘어부사시사’를 읊었을 고산의 모습이 선하다. 복원된 것은 1천여평에 불과하나 애초엔 3천여평이었다고 하니 그 위세가 놀랍다. 마지막 생을 마감한 낙서재,부용동 골짝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연꽃잎 곡선을 닮은 앞산 능선을 보니 편안함 자체다. 그곳에 ‘동천석실’을 짓고 ‘낙서재’를 바라보며 신선처럼 다도를 즐겼으리라.
 

500년 금강송

아들이 공부했다는 ‘곡수당’은 ‘낙서재’ 아래자락에 연못과 너른 잔디 정원을 끼고 있다. 세차례에 걸쳐 16년의 귀향에도 불구하고 재산과 권력적 기반을 배경으로 강호자연을 즐겼던 사대부 계층의 여유로움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어부사시사’ 또한 어부의 사계절이라기보다는 섬에 정착한 낙향선비의 강호(江湖)에서의 감흥과 여유로움, 기쁨과 흥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선비들이 사계절을 자연과 벗하며 어떻게 즐길 것인지를 노래했다. 부용동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절벽위의 정자(亭子)‘동천석실’을 가보지 못했지만 다행히 낙서재에서 비친 그 위상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명의 임금을 섬기며 늦은 나이까지도 권력의 중심에서 당파싸움의 정점에 있었던 두 정치인이 보길도에서 조우(遭遇)하고 있다. 기묘한 인연이다.
 

500년 금강송과 세연정

남인의 윤선도, 서인의 수장 우암 송시열(1607~1689)은 모두 제주도 가는 길에 풍랑으로 이곳에 머물거나 잠시 들렀다. 당대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며 고산을 71세때 귀향 보냈던 송시열은 본인도 83세때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귀향길에 태풍을 피해 이곳에 들렀다. 자신이 몇 개월 후 사약을 받을 운명을 아는 듯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의 심경을 읊은 “여든셋 늙은 몸이 푸른바다 한가운데 떠 있구나”로 시작되는 마지막 탄시(嘆詩)를 새긴 ‘글씐바위’가 세연정과 멀지 않는 곳에 있다. 인생무상, 권력무상이다. 인간의 역사와 눈이 시린 절경지로서 자연경치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곳도 가보지 못해 아쉽다.
 

세연정

#섬은 열려있는 개방의 공간

활처럼 휘어진 예송리 갯돌 해변을 뛰어다닌다. 비취색의 아름다운 바다와 갯돌해변이 파도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큰바위가 닳고 닳아 검은 갯돌로 태어난 곳이어서인지 앉아서 놀기엔 적격이다. 하지만 칼날같은 바닷바람이 여유부릴 틈을 빼앗아가지만 천연기념물 상록수림을 싸고 도는 바람의 상쾌함은 그만이다. 이곳 앞바다까지 전복양식장 부표들이 점거하여 탁 트인 바다와 여백의 미가 아쉽다. 해수욕장으로는 수심이 깊은 이곳보단 은모래 백사장에 경사가 완만하여 물놀이 하기 좋은 중리와 통리해수욕장을 꼽는다.
 

땅끝 전망대 노을

내려오는 길가 곳곳이 황칠나무 재배로 한창이다. 보길도의 또 다른 미래 먹거리다. 서쪽 끝자락 ‘망끝 전망대’. 겨울철 일몰이 아름답고 날이 좋으면 제주도 한라산도 보인다는데 오늘은 멀리 추자도의 크고 작은 섬들만 들어온다. 해발 433m의 격자봉에 올라, 아니면 갯돌들의 둥그란 모습이 공룡알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보옥리 공룡알 해변에서 탁 트인 남해바다와 아름다운 해안선을 볼 기회를 다시 만들고 싶다.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도끼날을 닮은 도치미 절벽의 환상적인 풍광을 보며 걷고 싶다. 사방이 탁 트여 왕복 4㎞ 내내 바다와 섬들만 보인다는데….

‘유명세’에 대한 기대가 컷나? 봄과 가을엔 전국에서 등산객들이 줄을 잇고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몰리는 곳인데 아직은 관광철이 아니다 보니 여러 부분 아쉬움이 보인다. 돌아오는 길, 땅끝 전망대 휴게소에서 먹는 라면맛이 일품이다.불어 터진 라면이지만 추위는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보길도 명성에 걸맞지 않은 아쉬움이 밀려온 것인지 오는 버스길에 잠이 몰려온다.

아직까지 섬은 느림과 불편의 공간이다. 배도 결항이 잦다, 그러나 섬은 고립과 단절의 공간은 아니다.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있는 개방의 공간이다. 바다에 가면 막혔던 가슴도 트인다. 어머니의 품같이 평안하다. 그래서 그리움을 안고 우리는 다시 섬으로 간다. 사진제공/진유화 회원
 

노화도에서 바라본 보길대교와 보길도
낙서재에서 바라본 동천석실
남도 섬사랑 모임 회원들
곡수당
낙서재
예송리 몽돌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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