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사각지대 해소…고려인 동포의 든든한 지원군

<남도일보 나눔 시리즈-④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

13인 변호사·3명의 노무사 의기투합…‘해결사’ 자처

1년 6개월간 매주 한 차례 무료 법률 상담 ‘도움의 손길’

임금체불 등 피해사례 강력 대응…재발방지로 억울함 해소
 

지난 2017년 8월 광주YMCA 시민권익변호인단과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광주고려인마을 법률지원 협약식을 체결하고 법률사각지대에 놓인 고려인들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에 본격 나섰다./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 제공

조선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연해주(沿海州)에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 연해주는 두만강 위쪽이자 시베리아 동남쪽 동해에 인접한 지역이다. 블라디보스토크가 대표적 도시로 꼽힌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강압을 피해 이주해 살거나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들과 후손들이 고려인이라 불린다.

지금으로부터 82년 전인 1937년, 소련 극동지역 연해주에 살고 있던 고려인 17만여명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했다.

뿌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그들은 할아버지의 땅이자 낯선 이국의 땅인 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국내에 사는 고려인 동포는 약 7만여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광주 월곡동에 자리한 ‘고려인 마을’은 전국 최대 규모의 고려인 거주지다. 지난 2001년부터 고려인들이 살기 시작해 현재 4천여명이 집중적으로 모여들며 마을이 형성됐다.

고려인 동포들은 안정적 체류가 힘들고 언어의 장벽 탓에 한국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단한 고려인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주먹밥 정신으로 실현된 광주 각계각층의 애정 어린 손길도 지역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의료, 복지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지원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신분상 제약과 법률 지식 부족으로 속앓이를 하는 고려인들을 위해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고려인 법률지원단’의 나눔은 지역사회에 훈훈함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장인 강행옥 변호사가 고려인마을 역사박물관 1층에서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법률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고려인 범죄 사각지대 ‘도움의 손길’=지난 2017년 5월, 고려인 3세 A씨 등 4명은 영주권을 받게 해 주겠다는 브로커에게 속아 1천350만원을 뜯기는 사기 사건에 휘말렸다.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 동포들은 한국어가 서툰 탓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선뜻 도움을 요청하기 힘든 처지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 강행옥(59)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하고 무료로 법률지원에 나섰다. 강 변호사의 노력 덕택이었을까. 사건에 휘말린 고려인들은 피해 금액을 돌려받는 등 고통의 나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 변호사는 법률 사각지대에서 어려움을 겪는 고려인 동포들에게 법률 지원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고 이들의 아픔을 씻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지난 1991년부터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무료 법률 상담을 실시하고 광주YMCA에서 시민권익변호인단을 조직해 활동한 그는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재능 나눔을 펼칠 기회라고 여겼다.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YMCA 시민권익변호인단’과 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과 연결시켜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동료 변호사들도 취지에 공감하고 적극 동참했다.
 

매주 월요일마다 고려인마을을 찾는 법률지원단에게 상담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고려인 동포들.

◆13인의 변호사 ‘의기투합’…법률지원단 발족=2017년 6월, 고려인 동포들의 안타까운 삶을 돌보고자 13인의 변호사가 의기투합해 고려인마을법률지원단이 공식 발족했다. 강 변호사는 고려인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로부터 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장으로 위촉됐다.

강행옥 법률지원단장과 윤춘주 변호사를 비롯해 김경은·김나윤·김상훈·김지현·노강규·송지현·신광식·이민아·정인기·최형주·홍지은 변호사 등 13명은 자력으로 분쟁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고려인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고려인법률지원단에 동참한 변호사들은 같은 해 8월부터 달별로 조를 짜 매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고려인마을 역사박물관 1층에서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법률상담에 돌입했다.

변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지자 임금체불 등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생활고와 한국어 미숙으로 제대로된 법률 상담을 받지 못했던 고려인 동포들은 가슴 아픈 사연을 들고 매주 월요일, 역사관 1층에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문화 학교인 새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고려인 동포 학생들은 이들의 어려운 사정을 전하고자 통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지원단 출범 이후 좋은 취지에 공감한 정강희, 이정봉, 이진훈 노무사 3명도 합류해 변호사들과 함께 임금체불과 산재 등 다양한 사건 전반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고려인 동포의 체불임금 600여만원을 해결하기 위해 부산까지 동행하는가 하면 고용주의 거센 항의와 다툼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는 등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법률지원 90% 임금체불…강력 대응 나선다=유모(여·59·우즈베키스탄)씨는 2년여 동안 일한 지역 소규모 가전제품 회사에서 퇴직금을 받지 못해 지원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유씨는 연차수당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뿐만 아니라 고지 받지도 못했다.

손모(58·러시아)씨는 지난 2018년 11월 한 병원에서 작업하던 중 오른쪽 손가락을 다쳤다. 즉시 수술을 했지만 현재까지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심한 통증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업체측은 유씨에게 산업재해보상 절차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유씨는 결국 지원단의 도움으로 뒤늦게 산재를 신청할 수 있었다.

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은 지난 2017년 8월부터 17개월간 무료 법률 지원을 벌인 결과 총 594건을 상담했다.

사례 분석결과 이중 임금체불이 536건(90%), 산재 17건(3%), 비자문제 15건(3%), 기타 교통사고·부동산 임대차·채권채무 21건(4%)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피해 상담 건 수 중 가장 많은 임금체불은 개인당 수십 만원에서 수백 만원까지 다양했으며, 퇴직금을 떼인 노동자들도 수십 명이 넘었다.

상담 과정에서 일부 업주들이 고려인에 대해 이주 노동자보다 못한 대우와 임금체불 등 불법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원단은 향후 강력 대응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노동청에 고용주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의 심판대에 올려 다시는 이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각오다.

광주 YMCA가 인지대 등 소송 비용을 지원하며 소송구조 변호사는 고려인마을 법률지원 단장인 강 변호사가 맡는다.

강 단장은 “뼈아픈 역사를 가진 고려인 동포들이 제대로 된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강경 대응할 방침”이라며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변호사 선임료를 마련할 수 없는 고려인 동포들의 사정을 알고 악의적으로 임금을 체불하는 고용주들에게 경종을 울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어렵게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포들의 뒤에 법률지원단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고용주들에게 각인시키겠다”며 “임금체벌 등 불법이 근절되고 동포들의 고민을 풀어줄 수 있도록 앞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치겠다”고 다짐했다.

/정세영 기자 jsy@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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