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과 호남여성
<프롤로그>
공장에서…농촌에서…학교에서
3·1운동 전후 항일독립운동에 큰 공헌

식민지·남존여비 구습 상황서 근대적 시민권 개념 자각
종교·야학·청년회·공장파업·휴학 등으로 일제 항거
막중한 역할에도 여성항일운동 체계적 연구·조사 미흡
호남지방 항일운동과 여성들의 역할 재정립 위해 연재

광주지역 여성들은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의 여러 공간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조선왕조시대 이래 팽배했던 남존여비의 구습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종교 활동, 부녀야학, 사회과학연구, 여성청년회 조직, 각종 소작쟁의, 공장파업 참가, 학교에서의 각종 교사배척운동이나 동맹휴학, 백지동맹을 전개하다 퇴학이나 무기정학을 받은 여학생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호남여성들의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은 매우 산발적이고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되지도 않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 25일 광주광역시 남구 사동 부동교에서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광주 행사가 열려 참석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광주지역 여성들은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의 여러 공간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조선왕조시대 이래 팽배했던 남존여비의 구습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종교 활동, 부녀야학, 사회과학연구, 여성청년회 조직, 각종 소작쟁의, 공장파업 참가, 학교에서의 각종 교사배척운동이나 동맹휴학, 백지동맹을 전개하다 퇴학이나 무기정학을 받은 여학생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호남여성들의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은 매우 산발적이고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되지도 않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올해 3월 9일 광주 수피아여고에서 열린‘광주 3·1만세운동 재현 행사’ 모습.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는 투쟁과정에서 숱한 호남인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그 시대를 흔히 항일의 시대로 부르지만, 동시에 그 시대는 오랫동안 신분제적 억압에 의해 신음해왔던 여성들이 근대주체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비록 식민지시대였지만 각종 물산장려운동, 부여교육, 연대, 돌봄, 나눔을 비롯한 항일운동을 통해 근대적 시민권의 개념을 자각하던 태동기이기도 했다.

호남지방 중에서 특히 광주전남지방은 대한제국 말기까지 동학운동, 1996년 을미의병, 1907년 정미의병이 전개됐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각종 항일운동이 이어졌다. 흔히 알려진 1919년 광주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같은 항일운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16년 광주 인근 화순과 보성 등지에서 비밀결사 대한광복단이 조직된 바 있고, 3·1운동 직후 김마리아 등에 의해 주도된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에 일정부문 영향을 받았다. 또한 호남지방은 각종 조선독립군자금모집운동이 전개된 곳이었다. 1930년대 초반 반제독서회, 반제농민운동, 1937년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이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는 여성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특히 광주에서는 여성들이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의 여러 공간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각종 항일운동의 마당에서 남녀를 막론한 항일운동이 전개된다. 그 시기 여성들은 각종 항일운동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한다, 조선왕조시대 이래 팽배했던 남존여비의 구습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종교 활동, 부녀야학, 사회과학연구, 여성청년회 조직, 각종 소작쟁의, 공장파업 참가, 학교에서의 각종 교사배척운동이나 동맹휴학, 백지동맹을 전개하다 퇴학이나 무기정학을 받은 여학생도 적지 않다. 3·1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 당시에는 항일격문을 작성하고, 시위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구속 연행되거나, 차가운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항일운동으로 투옥된 가족들의 옥바라지를 감수했다.
 

1929년 8월 도시제사공장 광주여직공들의 항일직공분규를 다룬 신문 보도.
1928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조직되었던 여성항일운동단체인 소녀회(少女會) 신문 보도.

이같은 호남여성의 항일운동에 대한 기록은 항일의 시대 100년이 되도록 여전히 산발적이고 미미하다. 1919년 광주3·1만세운동 당시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 24명이 구속된 바 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과정에서는 광주여고 학생 11명이 소녀회 사건으로 투옥되고, 나머지 48명이상의 여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았다. 일본계학교인 광주대화중에 다니던 여학생 2명과 1930년 3월 조직된 수피아여학교 백청단 참여 단원들의 활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화순 출신으로 광주여고보를 거쳐 이화여고보에 재학중인 박계월 등의 사례와 같이 서울, 전주, 진주 등지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여학생들에 대한 조사도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호남여성들의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은 매우 산발적이었다.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되지도 못했다. 이들의 항일운동 참여 이후 생애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것이다. 광주 100년 여성사 정립을 위해 이들 항일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기초자료발굴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남도일보에서는 광주·전남지방 현대항일여성운동사의 재조명을 위해 기획연재를 진행한다.

근대 호남지방 여성운동은 일상생활의 구습을 척결하는 부녀자운동과 항일운동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항일운동만큼이나 구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통해 국권회복에 기여하려는 운동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호남지방 여성운동에 대한 정립은 아직까지도 충분하게 정립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이 모두 항일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소극적인 항일운동에서 적극적 항일운동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전남지방 여성들은 각종 교회선교, 문예활동, 납량음악회 개최 등을 진행하는 가 하면, 소작쟁의와 같은 농민운동, 직공운동 등의 노동운동, 각종 청년운동 등에 참여했다. 여성들만을 위한 부녀야학이 있었고, 부녀들의 생활개선을 추구하는 문맹퇴치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도 전개했다. 일부 항일운동은 격렬한 항일로 표출되지만 어떤 항일은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1930년대 초반 농촌계몽운동에도 호남여성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이 밖에도 광주전남지역에서는 각종 여성들의 학생운동, 야학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참여사례가 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실정이다. 이 밖에도 1920년대에서 1930년대 무렵 각종 풍수해나 기아와 같은 재난사고가 발생하면 각종형태의 동포구제운동에도 호남여성들이 다수 참여했지만 그 실상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김홍길 박사(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비상임 전문위원)

■항일운동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 허스토리(herstory)

어떤 역사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해석의 영역으로 남는다. 남아있는 자료들에 의해 역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도 하고, 접근방법이 달라지기도 한다. 항일운동에 대한 기록은 주로 남성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주변부화 했던 기존의 역사적 접근을 극복하기 위해 학계 일부에서는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여성역할을 재검토하자는 주장도 대두하고 있다. 즉 기존 히스토리(history) 대신에 허스토리(herstory)적 측면하자는 그동안 누락되고 조명받지 못한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다. 한국사회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지배담론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남성 위주로 기술된 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항일운동사에서 여성의 역할을 누구의 어머니, 부인, 딸과 같은 측면에서 다루어진 경우가 아니라, 그 항일 여성을 주체로 접근하는 연구는 극히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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