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과 호남여성
(2)광주 수피아와 3·1만세운동
‘광주정신 출발’ 3·1만세운동에 학생들 대거 참여
3월 10일 거사일 전날밤 수피아기숙사서 태극기 만들어
학생들 고종 인산일 입었던 치마 뜯어 1인당 10개씩 제작
양림동서 광주천변 뛰어와 타학교 학생·시민들과 합세
윤혈녀 왜경에 한 팔 잃고도 다른 팔로 태극기 들고 만세

1919년 광주3.1만세운동으로 100여 명 이상이 3재판을 받았는데 수피아여학교에선 박애신, 진신애 선생 2명과 홍남순, 최경애 등 학생 20명, 수피아여학교 출신 간호사1명 등 총 23명이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사진은 광주3·1만세운동 당시 부녀자들의 만세운동 모습.

올해가 3·1 운동 100주년이다. 3·1 운동은 우리나라 민족 독립 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한 단계 고양시킨 중요한 분기점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첫 문장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3·1 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행사가 있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역사를 알아야 달라진 다음 100년을 준비할 수 있다.
 

수피아여고에 설립된 ;광주 3·1만세운동기념’동상 모습.

1919년 3·1 운동 당시 검거된 사람들 중에 학생과 교원이 2천355명인데, 그중 여교사와 여학생이 218명이었다. 1919년 당시 여자들의 취학률이 남자들의 100분의 1 수준도 안 되었던 것에 비하면 약10%를 차지한 것은 굉장히 높은 수치다. 또 광주의 경우 수피아 출신 여학생과 여교사가 23명이 구속되었으니 여자들 중 수피아여학교가 10% 넘었다. 그 당시 광주 수피아 여학교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이에 조아라회장을 비롯하여 수피아여고 교사, 동문들이 수피아여고 100주년에 십시 일반하여 ‘광주 3·1만세운동기념’동상을 세웠다. 광주 수피아와 3·1만세운동에 대해 좀더 조명하고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회가 신문화 운동의 요람이며 온상이었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광주의 경우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1919년의 광주 3·1만세운동의 주축을 이룬 것이 기독교였기 때문에 광주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의 참여도는 매우 컸다.

1919년 2월 중순경 김마리아(1910년경 수피아 교사 재직, 여성 독립 운동가)가 수피아에 들러 당시 교사로 있던 언니 김함나에게 2·8 독립 선언서를 전해주었고, 교사 박애순(朴愛順)이 수피아여학생들에게 만국강화회의 상황과 매일신보에 실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를 읽어 주고,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알려주어 수피아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불씨를 당겼다.
 

광주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같은날 나온 여성들 기념사진. 강화선 이나혈,최경애,양태원, 고연홍,김필호,최수향,이봉금 등.

1919년 3월 1일,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3·1만세운동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퍼져 가고 있을 때 그 움직임이 광주에까지 밀려 온 것은 3월 6일이었다. 그날 밤 광주 양림동 남궁혁 목사(김함라 남편)의 집에서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정인세의 장인)을 비롯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 진신애, 비밀독서회 회원 김태열, 정상호 등 12명이 모여 광주의 독립운동 계획을 세웠고 거사일을 3월 10일로 결정했다. 그리고 각자 맡은 일을 분담하는 등 세부적 계획을 세웠고 수피아에서는 박애순 선생이 학생을 동원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의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한편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은 3월 3일경에 수피아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매일신보의 기사를 읽어주고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들도 이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러야 된다”고 말함으로써 학생들의 피 끓는 애국심을 불타게 하는 동시에 전교생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학생들은 꿈에도 잊지 못하던 우리나라의 독립이 이제 눈앞에 다가왔다고 믿고 이 기회야말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때라는 생각으로 모두들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3월 9일 밤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이 양림동 오웬기념각에서 수피아 학생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수피아 박애순선생은 독립선언서 약 50매를 수피아 여학생들에게 분배하였다.
 

1919년 당시 광주우체국 모습.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피아 학생들은 기숙사 상급생들인 홍순남, 박영자, 양태원 등이 주축이 되어 기숙사 지하실에서 밤 12시가 넘은 뒤 몰래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태극기의 재료는 고종황제 인산날에 입었던 치마를 뜯어 한 사람이 10개씩 만들었다.

드디어,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 독립 만세의 함성이 터졌다. 거사 날 아침 박애순 교사는 홍순남, 박영자에게 독립선언서 50부를 나누어 주고 오후 2시까지 부동교(不動橋)밑 큰 시장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곳에서 오후 3시 30분에 일반 시민, 숭일학교, 농업학교 학생들과 합세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다. 저마다 가슴에 태극기를 품은 수피아 여학생들이 양림동 쪽에서 광주 천변으로 뛰어 내려와 마침 장날이라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주며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부르짖었다.

왜경들이 총대로 군중들을 마구 후려칠 때 수피아 학생들은 검정 통치마를 둘러쓰고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왜경들이 “남들은 종이 태극기인데 네년들은 돈이 어디서 나서 베로 태극기를 만들었느냐. 서양 놈들에게 돈을 받았느냐”며 수피아 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열세집과 반일회연극으로 항일의식을 표현한 윈스보로홀(1927년 건축)

광주 만세운동 당시 수피아 여학생 윤형숙(윤혈녀)은 왜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한쪽 팔이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도 다른 쪽 팔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광주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왜경에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언도를 받았다.

국가재판기록을 살펴보면 광주에서 100여 명 이상이 3·1만세운동 재판을 받았는데, 수피아 박애신, 진신애 선생 2명과 홍남순, 최경애 학생을 비롯 학생들 20명 수피아여학교 출신 간호사1명 등 23명이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올해 광주에서 열렸던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모습.

3·1만세운동을 위해 태극기를 만들었던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수피아홀 지하이다. 1919년 3월 10일 기미년 독립운동에 전교생이 선봉으로 참가하고, 비무장, 비폭력의 평화적인 시위였던 3·1만세운동은 상해 임시정부 등 해외기관과 연락하면서 장기적인 항일운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0년 뒤 1929년 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일제가 멸망할 때까지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했고 이는 전국적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됐다. 광주와 호남인의 정의감과 애국심은 나라를 살리려는 뜻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표출되었다. 광주의 3·1만세운동은 표표히 광주 정신의 출발이 되었다./홍인화 (수피아역사연구소 소장·전 광주광역시의원·국제학박사) /사진=수피아역사연구소 제공

홍인화 수피아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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