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80)

5부 정묘호란 1장 다시 백척간두에서 (480)

노리(老吏) 허씨가 눈꼽낀 눈을 껌벅거리며 감격해서 울고 있었다. 정충신이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어르신, 다만 선친께서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을 보지 못하셨으니 존장들께서 대신 인사를 받으셔야지요. 모두들 목사관으로 가십시다.”

목사관에 도착해 정충신이 동헌 대신 길청(아전 처소)으로 들어갔다. 이런 그를 보고 목사가 나와서 “나리, 동헌으로 들어가야지요” 하고 청했다.

“동헌으로 들어가면 상방(上房:관아를 이끄는 책임자가 거처하는 방) 아랫목에 앉게 되고, 거기 앉게 되면 위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이니,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고향사람들에게 늘 겸손하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래도 목사의 예는 있는 것입니다. 아랫사람들 체면이 있으니 상방에 들어가 저희 예를 받아주십시오.”

정충신이 도리없이 상방에 들어가 지방 관속들의 신고를 받았다. 그가 말했다.

“목사는 목사대로, 속리(屬吏:하급관리)는 속리대로 저를 융숭히 대접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본인이 열여섯 살 적에 광주목사관 통인으로 있으면서 권율 목사님의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때 깨우친 것이 많았습니다. 틈틈이 책을 읽는 한편으로 지방행정 운영을 살펴보고, 특히 왜란을 당했을 때 우리 고향 사람들이 화살을 만들고, 주먹밥을 해나르며 왜적을 물리치도록 도울 때 저 역시 고향 어르신들의 거룩한 뜻을 따르기로 했지요.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을 받들며 의병을 일으켜 하나같이 단결된 마음으로 왜적을 맞아 싸우니 전국에서 전라도만은 굳건히 땅을 지켰지요. 저는 고향으로 발령받지 못하고, 주로 서북 지방과 북방 변경 수호를 위해 북쪽에 가있었습니다. 두만강과 압록강 변경이지요. 그래서 고향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가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왜적을 꼼짝없이 물리친 것이 마음 든든하게 했으며, 자부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변경을 지키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알제라우. 장군께서 적을 만나는 족족 뿌솨버린 것을 보고 얼매나 통쾌했간디요. 그래서 정 장군은 고향의 신화가 되아부렀소.”

젊은 이방이 말하자 다른 관속이 나섰다.

“장군께서 전라도 군사들을 이끌고 행주대첩, 이괄의 난을 수습했단 말을 듣고 역시 전라도 장순게 다르구나 했제라우. 그런 소식 들을 적마다 허벌나게 가슴이 뛰더랑개요. 자랑스럽습니다요.”

“고맙소. 일간의 휴가를 마치면 나는 다시 북방 변경으로 갑니다. 혹, 군인으로 키울 아들이나 형제가 있으면 나에게 맡겨주시오. 데리고 가서 키우겠습니다.”

정충신이 고향을 방문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광주 읍내 사람들이 목사관 앞 동헌 뜰로 모여들었다. 나이든 이들은 “참 귀히 되었어.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깊고 야물딱지더니 기언치 한 자리 해버리고 말고만이” 하고 칭찬했다.

“거기다 공손한 것이 익은 나락과 똑같당개. 어찌 저렇게 됨됨이가 느자구(쓸모)가 있으까이.”

정충신은 환대를 받으며 옛집으로 가서 조부모와 부모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 임금으로부터 받은 증직 교지를 고유(告由:나라나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 사당이나 신명에게 신고하는 일)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뒤이어 정지 할아버지, 선친의 묘소가 있는 무등산 북서편 산록으로 향했다. 오늘의 광주시 북구 망월동이다.

정충신은 9대조 경렬공 정지 장군의 묘소부터 참배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정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자라 정충신 자신도 할아버지와 같은 훌륭한 장군이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소년시절 두려움 없이 이천오백리길을 한달음에 달려 압록강변 의주행재소에 권율 목사의 장계를 가지고 간 것도 정지 할아버지의 기개와 사명감을 가슴 속에 품었기 때문이었다.

경렬공 정지 장군(1347-1391)은 최영, 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려말의 대표적 무장이다. 공민왕 대에 전라도안무사(오늘날의 도지사)로 임명되고, 우왕 대에는 순천도병마사로 나가 왜구를 격퇴했다. 같은 왕 14년(1388)에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 종군했으며, 이듬해 양광(충청도). 전라, 경상도절제체찰사가 되고, 제해도도원수(해군참모총장)로서 제해권을 장악했다. 왜구토벌책 및 토적책 10조를 왕에게 올려 왜구와 도적 토벌 정책을 입안했으며, 수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김저의 우왕 복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나주로 귀양갔으며, 윤이, 이초의 옥사에도 연좌되어 청주옥에 갇힌 수난을 겪었다. 말년에 수도 개성부사(현 서울시장)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그해(1391) 병사했다.

정지 장군의 묘소 바로 밑에는 정충신의 선친 정윤의 묘가 평토되어 있었다. 정충신은 아비의 묘가 평토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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