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43)

6부 7장 병자호란 전야

-국가의 존망이 병자년 올해 판가름 나겠구나. 이것이 도대체 무슨 재앙인가.

하필이면 정충신은 경상병사직을 사임한 뒤 투병중이었다. 은퇴한 데다 병중이었으니 정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나라가 절단나게 생겼다.

“어떤 놈이 이렇게 나라를 진구렁창으로 몰고 가나. 전후좌우도 모르고 날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조문 사절을 쫓아버리고, 그 뒤통수에다가 척화하고 절화한다고 하니, 큰 일이로다.”

정충신은 병든 몸을 이끌고 최명길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에 당도했을 즈음, 포도청의 포졸들이 길을 막았다.

“정충신 나리,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포졸을 지휘하는 포교가 달려와 그의 앞에 각지게 머리를 수그리고 나서 물었다. 엊그제만 해도 포도대장으로 있었으니 그들은 정충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천 대감을 만나야겠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자 포교가 낙망하는 빛이더니 말했다.

“나리, 안됩니다. 저희만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궁궐 수비대도 나와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만나지 않으면 나라가 결단난다. 꼭 만나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정충신이 숨넘어가는 듯 기침을 하고, 각혈을 했다. 애처롭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포교가 잠시 궁리하더니 말했다.

“대장 나리, 소인이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대장 나리께서 집으로 돌아가시고, 대신 최명길 대감이 나리를 문병가시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순서로 보나 절차로 보나 온당한 것 같습니다. 병중인 지우를 문병가는 것까지 막는 비정한 조정은 없을 것이니, 소인이 그렇게 할 것이온즉, 지금 돌아가셔서 몸을 다스리십시오.”

포교의 말이 일리가 있다 하여 정충신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최명길이 약 한 제를 지어 손에 달랑달랑 들고 정충신의 집으로 왔다.

“어찌 그리 이 중대한 시기에 병중이란 말입니까.”

최명길은 정충신이 누워있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덥석 엎어지듯 하면서 정충신의 깡마른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올해 나이 예순하나, 백발이 성성한 얼굴에는 어려서부터 큰 난리를 겪은 까닭에 병든 것조차 잊고 몸을 마구 부렸으니 무쇠인들 견디겠는가. 최명길은 깊은 회한에 잠기어 울컥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장인 장만(張晩)이 함경도관찰사로 복무할 때, 함경도 변경의 조산보 만호, 보을하진 첨사로 있던 정충신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라를 개혁하자고 결의를 다지던 기개가 시퍼랬는데, 나라는 변하지는 않고 인걸은 죽음 곁에 다가가 있다. 그는 정충신이 장만 장군의 막료로서 한 치 흐트러짐없이 청렴하고 곧고 용맹스럽다는 사실을 직접 장인으로부터 들었다.

장만 장군은 청년 군교시절부터 정충신을 눈여겨 보았다. 누르하치의 침입을 경고해 방어책을 세우는 한편으로 친교를 강화해 애초에 침략을 사전에 막았고, 군제(軍制)를 개혁하고, 여진 추장에게 공첩(公牒)을 전달해 여연(閭延) 등 폐지되었던 4군(郡)이 조선의 땅임을 인식시켜 살고 있는 여진사람들을 철수하게 하는 데 외교역량을 발휘하는 데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 주청부사로 명나라 수도 연경에 갔을 때도 수행한 정충신이 국방비 지원을 약속받는 데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권간(權奸)들의 시기를 받고 벼슬을 포기할 위기에 처한 장만을 광해군 앞에서 적극 변호했고,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등극하자 도원수에 임명되어 원수부를 평양에 두었을 때,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후금 교섭창구로서 외교적 역량을 십분 발휘해 적정 상황을 안정시켰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인재였다. 그러나 그런 지난 일을 생각할수록 그의 노환이 유감이었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있는데 그는 늙고 병들어있다.

두 사람이 이심전심으로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걱정하고 있을 때, 장유가 문병을 왔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세 사람 모두 오성 이항복의 문하생이었으니 평소에도 정분이 깊었다. 장유는 정사공신 2등으로 신풍군에 봉해진 사람으로, 후일 효종의 왕비가 된 인선왕후의 친정 아버지가 된다. 올해 갓 쉰으로 지천보다 한 살 아래요, 정충신보다 열한살이 아래였지만, 모두 같은 문하였으니 허물이 없었다.

최명길이 할 말을 하려다가 주춤하는 듯했다. 장유는 잘나가는 현역이고, 노선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앞에서 나라의 궂은 말을 할 여건이 못되었다. 난세일수록 심중의 말을 삼가는 것이 신변안전상 필요한 조치다. 더군다나 그는 연금 중이다. 그러나 정충신은 죽을 날도 멀지 않았다고 보고, 비장한 각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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