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영일정씨(迎日鄭氏) 소은공파 계당종가<34>
송강정철 숨결 간직한 문화재 지킨다
문형 배출한 군자 가문
한국 최고 정자 식영정·환벽당
명승 보존 위해 공익기부
문학의 길 만수명산로 알려
전남 담양 가사문학면 지실마을은 무등산을 바라보고 좌측에 ‘소쇄원’, 우측에 ‘식영정’, 마을앞 증암천 건너에 ‘환벽당’이 있어, ‘1동 3명승’이 보존된 유서깊은 곳이다. 행정지명은 지곡리인데, 마을 뒷산 장원봉에서 흘러내리는 만수동계곡의 창평고읍으로 난 길을 걸으며 조선의 대문호로 성장했던 송강 정철의 발자취가 매화향기 가득한 영일정씨(迎日鄭氏) 소은공파 계당종가에 이어지고 있다. 400년 명승 문화재를 지켜 온 문인가문 소은공파의 계당종가를 찾아 집안의 내력을 살펴본다.

계당종택

◇감무공 정극유 중시조
영일정씨는 신라 건국의 6부촌 중 자산진지촌장 지백호가 유리왕으로부터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지며, 그 후손으로 신라 간관을 지낸 정종은을 시조로 모신다. 시조 이후 계대가 실전되었다가 경북 포항의 연일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집안 사람으로 고려조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을 중시조로 하는 지주사공파, 고려조 감무를 지낸 정극유를 중시조로 하는 감무공파로 분파되어 계대가 이어진다.
감무공 6세로 고려조 지밀직사사를 지낸 정사도(1318~1379)는 최영장군을 죽이려는 신돈의 음모 등 불의에 맞서다가 두번의 고초를 겪었고, 우왕 때 권신 이인임에게 정몽주·이숭인 등과 함께 유배당한 충신이다. 감무공 7세 정홍(?~1420)은 보문각 대제학에 오른 문형이다. 그의 두 아들 중 정진(1378~1418)은 형조·공조판서를 거쳐 삼번절제사에 올랐고, 정연(1389~1444)은 천추사·사은사로 두번이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형조·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정연은 세종의 세째왕자 안평대군 이용을 사위로 맞아 왕실 인척으로서 가문의 영광을 얻었다.
◇왕실과 인연은 양날의 칼
감무공 12세 정철(1536~1593)은 맏누이가 인종 귀비가 되고, 셋째누이가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 된 이유로 어린시절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명종)과 친구가 되기도 했으나, 계림군이 을사사화에 연루되면서 형은 죽고 부친 정유침도 유배된 후 부친을 따라 남쪽 담양 창평에 입향했다. 그는 환벽당을 세운 사촌 김윤제에게 수학하고, 외손녀 사위가 됐다. 과거에 급제해 사헌부정언·이조좌랑을 거치며 원칙과 소신으로 격탁양청(탁한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끌어들인다)을 내세워 사림의 정치 진출을 도모했다. 파면과 삭탈관직을 연거푸 당하고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절의로서 군자다운 자세를 지켜 동서붕당 후에는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에 맞섰다. 좌의정에 올라 기축옥사를 앞두고 우의정을 거절했으나 선조의 세차례 재촉으로 책임을 맡았으나 세자책봉문제로 계략에 빠져 유배됐다. 임진왜란을 맞아 경기·충청·전라 체찰사, 명나라 사은사를 역임한 후 동인의 모함으로 강화도에서 생을 마쳤다. 관동별곡 성산별곡 등 작품집 ‘송강가사’, ‘송강집’을 남기고 송강서원, 오천서원에 제향됐다.
◇조상의 빛나는 공적 지켜낸 후손
감무공 13세인 정홍명(1582~1650)은 김장생에게 학문을 배우고 문과급제했으며, 인조반정 이후 등용돼 이조참의, 대사헌까지 역임하고 대제학 문형에 올랐다. 기암집과 기옹만필, 은빙행기를 남겼다. 16세 정흡(1648~1709)은 정조 때 충의위를 역임하고 낙향했다. 김성원이 왜군에게 변을 당해 김덕령마저 모함으로 옥사해 집안에서 환벽당과 식영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빛나는 조상의 자취가 있는 환벽당을 인수하고 지키겠다는 뜻으로 자신의 호를 수환으로 불렀다. 17세 정민하(1671~1754)는 환벽당에 기거하며 학문에 정진했고 지실마을 계당에 종가를 열었다. 만년에 식영정에서 시를 짓고 피리를 즐겨 불어 호가 소은이고, 소은유고를 남겼다.
◇한 마을 세 명승 보존 앞장서
계당은 환벽당에서 옛창평으로 가는 옛길 만수동계곡 입구에 있어 정철이 공부하러 오가며 쉬어가는 이웃집이었는데, 정홍명이 사들여 집을 지었고, 종가 1세인 정민하가 계당터에서 11명의 아들을 낳아 11용동이라고도 한다. 12대를 이어 온 계당종가의 정구선 종손은 ‘성산(星山)’의 별성자는 우리말 ‘벼랑’을 한자로 바꾼 것이고 ‘벼랑산’은 절벽위에 세워진 식영정 언덕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종가가 지켜온 보물, 명승 제57호 식영정은 성산별곡의 무대다. 식영정 노인 임억령이 한시를 지으면, 이에 화답하면서 제목과 운자를 그대로 둔채 한시를 짓는 젊은 천재들이 고경명, 김성원, 정철, 세사람인데, 이들을 일컬어 ‘식영4선’이라 하고, 그 한시 20수는 ‘식영정잡영’에 전한다. 이를 부연설명하고 정돈해 한글가사체로 지은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이 탄생했다.

무등산에서 발원해 영산강을 향하는 증암천은 소쇄원 앞에서는 창계라 하고, 환벽당 앞에서 굽어져 식영정 아래로 흐를 땐 ‘자미탄’이라 부른다. 비록 광주호와 도로개설로 자미탄 풍광은 변했지만 문학작품 속에 남아 한국 대표하는 명승 정자의 격조를 높이고 있다. 종가는 송강의 문학작품이 기억될 수 있는 자연유산인 만수명산로 계곡이 옛 비경처럼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1만3천평의 땅을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증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성산별곡 시비
식영정
계당의 별칭인 십일용동 현판
환벽당에서 식영정으로 흐르는 자미탄. 절벽 위 식영정에서 무등산 쪽을 바라보면 환벽당이 푸른 소나무에 둘러쌓였고, 수변에 늘어선 백일홍이 필 때면 붉은 빛깔로 반사되어 아름다운 계곡물이 되기 때문에 자미탄이라 불렀다고 한다. 광주호가 되어 건천기에만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다.식영정이 있는 절벽을 벼랑산이라 불렀는데, 절벽 중턱으로 도로를 개설하면서 벼랑산의 모습도 변했다고 한다.
백일홍에 둘러싸인 식영정 전경. 뒤에 보이는 산이 무등산이다. / 정구선 계당종가 종손 사진제공
식영정 아래 서하당 전경
식영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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