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표 전 고등학교 교장의 남도일보 월요아침
12월의 리츄얼
김용표(전 백제고등학교 교장)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지만 지인 중에 매년 12월 말이면 배낭을 꾸려서 혼자 지리산으로 떠나는 이가 있다. 그는 혼자 1박 2일 동안 산에서 지내면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고 묵묵히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그것을 30대 중반부터 매년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20년째 반복하고 있다고 하니 일종의 자기만의 종교적인 의식이 된 셈이다.

수년 전에 김정운이라는 문화심리학자가 방송에 나와 “사람은 각자 하나쯤은 리츄얼을 갖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리츄얼이란 일상의 반복적인 행동 패턴으로 습관보다 더 엄격하게 의식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러한 리츄얼의 의미에 ‘혼자 하는’이라는 수식을 덧붙이고 싶다. 사

람들은 12월이 되면 관행적으로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와 함께 특별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 물론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혼자만의 리츄얼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산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세상을 혼자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쯤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시간을 갖고 그동안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의식(儀式), 즉 리츄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지인처럼 1년의 마지막 날에 혼자 산행하는 것도 좋고, 새해 아침 혼자서 영산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늘 누군가와 함께하던 연말연시에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약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혼자 해볼 만한 것은 무수히 많다. 나는 이번 연말에 차로 갈 수 있는 먼 섬 하나를 정해서 거기까지 몇 시간이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하고 싶다.

코로나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먹고, 혼자 영화 보는 것이 처량한 일이 아니고 의외로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혼자’ 혹은 ‘홀로’가 소통의 차단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고요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지금 2∽30대의 혼밥, 혼술 문화가 이기적인 세대의 이기적인 생활습관이라는 매도는 조금은 어처구니없다.

문화도 트렌드가 있다. 그러니 그 트렌드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것도 일종의 맥락맹이다. 인류가 야수와 다를 것 없는 고대시대에서 문명을 이룬 이래 전 세계 공통의 규범 중의 하나는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마라.”이다. 일종의 황금률(Golden Rule)이다. 모든 존재의 신성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황금률도 자신을 먼저 이해하기 전에는 허무한 말이다. 그러니 가끔은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 혼자만의 리츄얼’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세 가지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복’과 ‘의미부여’ 그리고 ‘비움’이다. 우선, 매년 혹은 매일 ‘반복’되는 행동패턴은 자기 자신에게 거는 일종의 최면 같은 것이다. 루틴과는 조금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의미부여’란 꼭 해야 하는 종교의 의식처럼 내가 정하고 그것을 행하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면서 내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움’이라는 과정이 꼭 들어가야 한다.

우리 삶은 늘 채우는 일에 익숙해 있다. 채우는 일은 처음에는 행복해도 점점 고통이 증가하는 일이고, 비우는 일은 처음에는 고통스러워도 점점 더 행복해지는 일이다. 사실, 채우는 일은 자신을 들볶는 일이다. 자신을 들볶고 닦달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남을 닦달하는 짓도 하지 않는다. ‘비움’은 리츄얼의 과정에 필수적이다.

‘하루 만 보 걷기’ ‘하루 108배’와 같이 매일 반복해야 하는 리츄얼은 쉬워 보여도 전혀 쉽지 않다. 매너리즘에서 빠져서 자꾸만 흐트러지는 자신을 극복하는 좋은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 또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매년 12월에 딱 한 번만 하는 ‘나 혼자만의 리츄얼’이 어떤가? 그 순간만이라도 내 삶은 예술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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