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공동기획 = 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이야기
<10> 암태도 소작쟁의
암태도, 일제 강점기 섬 항일 농민운동 횃불 지폈다
일제 산미증식·저미가·천일염 정책 발단
1923년 12월 소작인회 결성 항일투쟁‘물꼬’
이듬해 지주와 협상 통해‘소작율 인하’성과
농민 생존권 투쟁 넘은 사회여성운동도 촉발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는 단순한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넘어서 일제 강점기에 맞선 항일민족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평가되고 있다. 암태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농토가 많은 곳이다. 사진은 하늘에서 바라 본 신안 암태도 전경. /신안군 제공

‘섬’은 항일운동의 등대와도 같은 곳이다. 의향 남도의 정신이 섬사람들에게 전승되어 일제강점기 다양한 형태의 항일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현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쟁의’이다. 소설 ‘암태도 소작쟁의’(1969, 박순동)와 ‘암태도’(1981, 송기숙)를 통해 일찍부터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12월에 소작인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었고, 1924년 8월에 지주 문재철과의 협상을 통해 ‘소작율 인하’라는 성과를 얻었다. 그 영향을 받아 현 신안군 지역의 경우 자은도, 도초도, 지도, 매화도, 하의도 등에서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지역에서 1920년대 농민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른 인물의 숫자만 123명에 이른다. 암태도가 횃불이 되어 일제강점기 활발한 항일농민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에는 한국의 섬 문화와 섬사람들의 지적전통이 담겨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첫째는 “왜 섬에서 농민운동이 이렇게 치열하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문제이고, 둘째는 “소작쟁의를 항일민족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먼저 섬에서 농민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난 이유에 대한 부분이다. ‘섬’이라고 하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육지와 가까운 섬 주민들의 주요 생업은 대부분 농업이 중심이다. 이는 한국의 섬 문화가 가진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해진 이후 다시 섬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황무지 등을 개척하여 농지를 늘리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농업이 섬에서도 중요한 경제 기반이 되어왔고, 섬사람들에게 농토가 갖는 의미는 더욱 특별했다.

암태도 소작인 항쟁 기념탑.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섬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20년부터 추진된 ‘산미증식 계획’과 ‘저미가 정책’이 대표적이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자국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쌀의 생산량을 늘렸고, 한국 내의 쌀 가격을 낮게 유지하였다. 이에 지주의 수익이 감소 되자, 지주는 소작료를 올려 그 부족함을 채우려 했다. 이러한 흐름이 국내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저미가 정책’으로 인한 지주의 횡포는 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 전국적인 양상이었다. 섬에서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일어난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섬 고유의 인문환경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섬 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위협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일제의 천일염 정책으로 인한 피해였다. 소금생산은 섬사람들에게 중요한 경제생활의 기반이었다. 전통적인 소금생산법은 바닷물을 가마에 넣고 끓여서 만드는 방식이었다. 서남해에서는 이를 흔히 ‘화염’ 혹은 ‘자염’이라 칭한다.

현 신안의 섬 지역은 최대의 소금 생산지였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태양열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는 천일염전이 도입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1907년 인천 주안에 최초로 시험 조성되었고, 이후 대규모 천일염전이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주로 개발되었다. 일제는 천일염전을 통해 소금생산을 독점하고, 이를 관영화하여 세입을 확보를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소금 생산지였던 전남의 섬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운송이 편리한 서울과 평양 등 대도시 주변에 천일염전을 집중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섬 지역의 화염은 몰락했고, 섬사람들은 생활고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1926년 1월 24일 발행 된 시대일보에는 “제염이 관영화되면서 섬 주민들의 생활고가 가중되었기 때문에 최근에 섬 지역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는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식민정책에 의해 섬 주민들의 중요한 경제 기반 중 하나였던 염업이 어려워지고, 지주들의 소작율 인상 횡포가 더욱 심해지는 상황에서 소작쟁의가 치열하게 발생한 것이다.

이제 이러한 흐름에서 발행한 소작쟁의를 과연 항일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농민운동은 생존권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소작쟁의’는 불합리한 소작율을 개선하기 위해 농민이 땅을 가진 지주에게 저항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의 대상인 악덕 지주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성장했고, 권력의 기반 위에서 지주권을 행사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표면상은 한국인 지주와의 갈등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정책이 있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식민지 상황을 끝내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지니게 된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생 과정과 주도 인물, 참여 범위,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독립운동가인 서태석과 박복영이 주도하였다는 점이 그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열쇠이다. 둘 다 이미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단발적으로 소작쟁의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항일운동을 지속하는 과정의 하나로 고향인 암태도에서 소작쟁의를 주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암태도 소작쟁의는 서울청년회·조선노농총동맹 등 전국적인 항일단체들의 지원과 연대 속에서 추진되었다. 쟁의가 발생하기 전부터 서울청년회의 활동가들과 섬 주민들이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고, 쟁의가 시작된 후에는 조선노농총동맹과 같은 전국단위 조직에서 암태도를 지원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작인회를 농민조합으로 발전시켜 투쟁을 이어갔으며, 섬 주민의 교육기회를 늘리기 위한 사회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나아가 섬의 농토가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아사동맹’투쟁을 위해 돛단배를 타고 암태도를 떠나 목포로 가는 주민들.(정광희 作, 도서문화연구원 소장)

한편, 암태도 소작쟁의는 여성운동의 역사에서도 주목된다. 암태도 소작쟁의 하이라이트는 구속된 간부를 석방 시키기 위해 섬 주민 600여 명이 바다를 건너가 목포법원 앞에서 굶어 죽기를 각오하고 투쟁한 것이다. 이를 당시 언론에서는 ‘아사동맹(餓死同盟)’이라 칭하였다. 이 아사동맹을 주도한 인물이 암태여성회의 대표 고백화였다. 그는 당시 68세의 고령이었는데, 주민들의 동참을 촉구하고 주민대표로 판사를 면담하기도 했다. 소작쟁의 이전부터 암태도에 여성 사립학교를 만들어 교육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특징을 종합해 보면 암태도 소작쟁의는 단순히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해 우연히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1920년대 사회운동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항일민족운동의 연장선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급변하는 인문환경의 변화 속에서 섬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어떻게 대처했으며, 전통적으로 이어져 섬 주민들의 온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이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글/최성환 교수 (목포대 사학과·도서문화연구원)

정리/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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