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처럼
김홍식(전 광주서부교육장)

평생 키워온 몸통을 누군가에게 통째로 내어주고 그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가장 가난한 높이로 나이테의 숨결을 전해주고 있는 그루터기를 만나면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숱한 세월의 흔적을 애써 읽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하나의 감동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 주고도 아직 남은 사랑이 미련으로 남았는지 오가는 사람들에게 마음 편히 한숨 돌리게 하는 쉼터를 하나도 아낌없이 그리고 부담 없이 제공한다.

이름도 그렇지만 그루터기를 꼭 닮은 마을 축제가 있다. 10년 전에 시작한 ‘그루터기’ 축제! 사실 축제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하나의 매듭을 짓고 서로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소통과 화합의 장이다. 나아가 좀 더 나은 일이나 내일을 기약하며 따뜻하게 어깨동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K종합사회복지관과 인근학교 교육복지사들이 뜻을 모았다. 학교, 복지관, 행정복지센터 등이 공동으로 마을 축제를 하자는 것이다. 대개 학교에서 하는 축제에 지역사회가 몇몇 프로그램으로 일부 참여하는 경우는 있어도 아예 학교 밖에서 이런 축제를 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뜻이 너무 좋다. 자신들이 맡아서 하는 일에다가 새롭게 업무량이 늘어나는 걸 기꺼이 감수하며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이 일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누가 뭐라고 말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서로의 담장을 열고 자신들의 열정과 사랑을 지역사회에서 나누겠다고 하니 거절한다면 이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이 하나 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마을이 학교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을교육공동체의 출발도 이런 작은 축제가 영감을 주면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지역에서 여러분들이 공감하는 축제에 우리 학생들이 함께 무대를 꾸미고 진행하면서 부쩍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마을 어르신들과 친숙하게 소통하면서 서로를 소중하게 인정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축제를 넘어 훌륭한 교육의 시·공간이다.

축제의 여파는 마을에서 구체적인 징표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인사하기다. 등·하굣길에 만나는 어른들을 보고 반가운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은 어른들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지금 기성세대들의 청소년기에는 마을 어르신 한 분 한 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들에게 꾸짖고 나무라며 바른길을 가도록 지도하는 교육자 역할을 다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놀이터나 거리에서 청소년들이 버젓이 흡연이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고 있어도 못 본체 애써 외면하며 그곳을 지나친다. 괜히 어른 행세하려다가 봉변을 당할까 저어하기 때문이다. 어른은 있어도 진정한 어른이 없는 셈이다. ‘마을이 학교’라는 말도 공허해지는 대목이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어른다운 어른이 어른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더 큰 문제다. 진정한 소통을 방해하는 갑질이나 꼰대질은 결코 해서는 안 되지만 좋은 어른으로서 정상적인 지도나 안내조차도 한꺼번에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루터기’ 축제는 마을에서 교육이 일어나고 살아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교육적 의미가 남다르다. 어른들과 선배에게 지혜를 배우고 젊은이에게서 활력과 희망을 얻는 것, 이게 바로 진정한 축제의 의미다.

그루터기를 보면 끝나도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이심전심으로 느낀다. 흙 속에 있는 마지막 실뿌리 하나까지 가뭇없이 흙으로 풍화되는 그 순간까지 후회 없이 내어주려는 그루터기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우리 지역 마을 곳곳에서 마을을 살리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소담한 축제가 오롯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루터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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