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127) 요조숙녀(窈窕淑女)

<제4화>기생 소백주 (127) 요조숙녀(窈窕淑女)

그림/김리라(성균관대 미술학부 졸업)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어도 그 재주와 능력으로 사람 앞에 나서서 자랑하지 아니하고 또한 지위와 어떠한 재물도 사사로이 챙기지 않는다. 외향은 가난한 세인들의 삶과 마찬가지나 그의 정신은 뛰어난 성자(聖者)의 정신을 가지고 실천하며 산다. 그러기에 노자(老子)는 ‘진정한 앎이 있는 사람은 그 이목구비를 틀어막고, 지혜의 문을 닫으며, 지혜의 예리함을 꺾고, 지혜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을 풀고, 지혜의 빛을 늦추고, 그리고 속세의 티끌과 하나가 되니,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천하에 가장 귀한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늘 유세객(遊說客)들로 득실거린다. 유세객들의 최종 목표는 출세다. 그들은 온갖 값나가는 유행하는 낱말들을 만들고 가져와 자신을 치장한다. 백성과 하늘이 시대의 이상이었을 때는 절대군주도 이민위천을 가져와 자신을 드높였고, 민주와 정의가 시대의 이상이었을 때는 학살자조차도 민주정의를 이용해 자신을 치장해 드높였다. 그런 유행한 낱말들은 너무나 많다. 자유, 유신, 반공, 통일, 농민, 노동, 서민, 경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런 낱말들은 결국 시대의 출세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눈먼 자들은 그들의 언어에 현혹되고 영악한 자들은 그들의 언어에 영합하여 자신의 이익을 최종적으로 획득하려 든다. 그리하여 세상은 마침내 가짜들로만 득실거리게 되었다. 입으로는 진실을 말하는데 결론적으로는 제 이익만을 셈하고 탐한다.

그러나 현자(賢者)들은 달랐다. 허유는 요임금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말을 듣고 귀가 더러워졌다면서 영천의 물에 귀를 씻고 기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고, 이 말을 들은 소부는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노병사(老病死)를 고뇌한 왕자 싯타르따는 왕궁을 뛰쳐나가 걸인(乞人) 수행자(修行者)가 되었고, 장자(莊子)는 늘 누더기를 입고 유세하며 가난하게 세속에 묻혀 살았고,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초야로 돌아가 자급자족하며 고단하게 살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시대가 지향하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이상을 향하여 자신을 내던졌는데, 그 지고지순한 선행(善行)을 지위와 돈으로 환산하여 다 받아 챙겨버린다면 그 선행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어느 시대나 시대의 맨 앞에 나서서 빛나는 자들은 날카롭다. 지덕(智德)과 재기(才氣)를 감추지 않기에 휘황찬란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끝은 늘 공허하고 차갑고 허탈하고 처참하다. 그것을 깨달아 아는 자는 절대로 오르려 하지 않고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오르면 내려와야 하고 채워진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비워져야 하는 고통 즉 흉(凶)을 당한다. 그러나 사양하여 오르지 않고, 채우려 하지 않는 자는 길(吉)하여 복을 얻는 것이다. 아마도 김선비와 소백주가 그러한 것이리라!

어려 부모 죽고, 이혼을 하고, 아들 백어가 먼저 죽고, 제자들이 먼저 죽어 간 인생의 깊은 고통을 안고 살아간 공자(孔子)라는 사나이가 사무사(思毋邪)의 맑고 순수한 마음이 담겨있다고 극찬한 시경(詩經)을 편찬할 때 ‘어느 시를 제일 앞에 놓아야 할까?’하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제자들은 주(周) 문왕 서백의 선정(善政)을 찬양하는 시를 맨 앞으로 올리자고 했다. 그러자 공자가 세상이 좋아지면 사람들은 문왕의 선정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남녀 간의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하면서 군자(君子)와 요조숙녀(窈窕淑女)의 사랑을 노래하는 관저(關雎)라는 시를 국풍(國風) 맨 처음에 실었다. ‘꾸욱꾸욱 우는 물수리(關關雎鳩) 황하의 모래톱에 있듯이(在河之洲) 요조숙녀 고운 아가씨(窈窕淑女) 군자의 좋은 짝이라네(君子好逑)’ 역시 공자는 인간과 인간의 역사와 인간 삶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김선비와 소백주의 사랑이 마치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은데 남녀 간의 사랑이 고래로부터 이 땅에서는 돈과 지위와 권력과 뭐 그런 배경으로 흥정되고 거래되는 시대에 군자도 요조숙녀도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이 험난한 자본의 시대에 어디서 그런 사랑이 있기나 할까 싶은데, 또 따지고 보면 이정승 같은 교활한 자가 판을 치는 시대에, 이정승 같은 자들에게 속도 모르고 농락당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저 어리석은 자들이나 혹은 이정승 같은 탐욕에 빠진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이 세상을 주무르는 시대에, 묻노니? 오늘 김선비와 소백주가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이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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